혼자 걷는 해파랑길, 밤바다를 파도와 함께 걷는다

25코스 : 기성면 - 수산교. 23.2km

by 물냉이

해파랑길 25코스는 기성면의 버스터미널 옆에서 출발해 논길을 지나 산길을 걷다 보면 바다와 만난다. 사동항에서부터 망양정까지 고운 모래사장과 바다에서 뭍으로 오르려는 바위들의 등에 부서지는 파도를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망양정은 월송정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관동 8경 중 하나이다. 망양해변 옆의 망양정 옛 터와 왕피천 하구에 있는 망양정 두 곳을 걸으며 만나게 된다. 코스가 길어 조금 늦게 출발할 경우 밤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지만 밤길에도 절경이 펼쳐지는 길이다.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에서 미를 찾는다(기성면 - 사동항)

기성터미널을 떠나 논이 넓게 펼쳐진 기성들을 걷는다. 휴면기의 논에는 지난해 베고 남은 벼의 그루터기들이 물에 잠겨 목을 내밀고 있다. 어떤 것들은 자라지 않아도 아름다울 때가 있다. 기성들을 지나 산길을 걸으면, 사동항이 나올 때까지 양어장만 한번 지나칠 뿐 눈에 띄는 것 없이 지루한 산속의 포장도로를 걸어야 한다. 이런 길을 걸을 때는 주변의 작은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감상할 필요가 있다. 봄이 오는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산자락마다 듬성듬성 피는 진달래와 생강나무꽃을 감상하며 걸었었다. 초록이 물 번지는 산자락에 툭툭 피어오르는 연분홍과 묽은 노랑의 꽃말들을 엿들으며 만난 봄날의 햇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바다와 다시 만나기 전 동물들의 이동을 위해 만든 에코브릿지의 터널을 지나 내리막길을 걸을 때 다가오는 바다의 변주가 들려주는 감동이란.

기성들에 난 농로를 따라 걷는다. 휴식기를 지나 봄을 준비하는 논의 생명들을 볼 수 있다.
산길을 걷는다. 산길이어도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는 느낌이 다르다.
에코브릿지를 지나면 사동항이 보이는 바닷가로 나가게 된다. 파도가 들려주는 바다의 변주는 다가갈수록 크게 들린다.

사동항을 걷는 길에서는 바다보다 길가의 가로수가 눈길을 붙잡는다. 이 거리엔 곱게 미용시킨 스탠더드 푸들을 떠오르게 하는 가이츠카향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되어 있다. 가이츠카향나무는 향나무와 달리 잎이 뾰족한 바늘잎이 생기지 않아 조경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나무이다. 이렇게 길에 가로수를 모양을 내 관리하려면 누군가 정성을 다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삐쭉빼쭉 솟아오르는 잎과 가지를 관리하려면 품이 여간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도 가이츠카향나무를 닮은 사람과 향나무를 닮은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이츠카향나무같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향나무 같은 사람에게는 뾰족한 바늘잎이 있어 이것을 잘 모르는 이가 다가갔다가는 깜짝 놀라 물러설 수도 있다. 그러나 향나무 같은 사람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향나무의 바늘잎에 찔렸다고 해서 다치지는 않는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향나무 같은 사람의 경고용 몸짓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동항 북쪽에는 2001년 조성된 새천년 생명의 숲이 있다. 하지만 숲을 기대하고 찾아가면 실망하게 된다. 항 옆의 공간에 잔디와 몇 그루의 나무만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숲인지 조경용 화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런 숲은 해파랑길을 걸으며 서낭당보다 더 많이 나오지만 서낭당 주변의 전통숲이 주는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분명 예산은 훨씬 많이 들어갔을 텐데 관리도 잘 안되고 마을 주민이나 걷기여행자 모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숲의 안쪽에 크레용으로 그린 것 같은 서낭당이 있다. 이 서낭당의 안은 사방을 흰색으로 칠한 그저 그런 모습이어서 무대의 세트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서낭당 뒤의 바위에 뿌리를 내린 팽나무가 서낭당을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준다. 수령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두 갈래로 갈라진 뿌리 부분이 지상으로 드러나면서 마치 사람의 하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낭신이 자신의 감추었던 몸을 드러냈을 때 딱 마주한 느낌이랄까.

가이츠카향나무가로수가 군 의장대처럼 도열하고 있는 길을 걷는다.
도화지에 그린 그림 같기도 하고, 아이들이 블록으로 만든 집 같기도 한 서낭당
사람의 하체를 연상시키는 팽나무서낭목. 바위 위에 자란 기형의 나무는 오히려 신앙의 대상이 된다.


망양정 가는 길에 어둠이 짙어지고(사동항-기성망양해변-덕신리-오산항-진복리-산포리-수산교)

사동리의 바닷가에서 바위들이 육지를 향해 기어오르도록 밀어대는 파도를 감상하다 길을 떠난다. 아름다운 걸 보다 자리를 뜰 때는 그 경관이 주는 인력을 떨구어 내기 위해 발바닥에 힘을 주어야 한다. 다시 산길을 넘는다. 다시 에코브리지가 나오고 다시 바다가 나오는 데자뷔다. 얼마나 좋은가! 앞서 무심히 그냥 지나친 사람들에게 이번엔 느껴보라고 자비를 베푸는 자연이라니.

사동리의 바닷가에서 바위들을 육지로 밀어대는 파도를 감상한다.
다가가면 바다는 언제나 같은 목소리로 말을 붙여 온다.

걷기 좋은 기성망양해변의 숲길을 걸어 망양정 옛터를 오른다. 굳이 길에서 계단을 올라 옛 터에 서는 것은 오늘 코스의 끝자락에 있는 망양정을 해가 진 뒤 지나가야 할 듯하기 때문에 망양정의 두 번째 터였던 이곳에서 망양정을 감상하고 가자는 생각에서다. 망양정을 노래한 정철의 관동별곡뿐만 아니라 김시습, 박란, 심수경, 이산해, 정철, 정추 등 관동별곡을 시로 표현한 이들은 모두 망양리 해변의 망양정에서 바다를 보고 그들의 감상을 적은 것이다. 그러니까 산포리에서 만나는 망양정과 그곳의 바다 경관보다는 이곳에서 보는 바다경관이 선조들이 보고 감동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겸제 정선의 관동명승첩 중 망양정을 보면 바다와 맞닿은 바위절벽 위에 있는 망양정을 그렸는데 바로 기성망양해변 옆에 있는 이 망양정 옛 터를 그린 것이다. 바다와 바로 마주하고 있는 망양정과 바위절벽은 지금은 절벽 앞에 도로가 지나고 있어 조금 다르게 보이지만 잘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식물에 대한 정보도 있는데 산의 사면에 굵고 잘 뻗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에는 키 작은 관목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관목 중에 지금도 만날 수 있는 눈향나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산포리의 망양정만을 돌아보지만 옛 선인들을 감동시킨 망양정을 보려면 이곳으로 와야 한다.

정선의 망양정 그림에는 바다와 마주한 바위절벽 위에 자리 잡은 망양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자 옆에 무안박씨 영해파 꽃내마을 문중에서 세운 입판에 조선 중기의 문인인 박선장(朴善長)의 망양정시가 있다.


망양정

가슴을 여니 아득히 삼신산은 먼데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있네

평생에 바다 보려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보시게나


망양정시를 번역한 사람은 다산연구소 이사장인 박석무 선생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지만 국회위원으로 활동하다 다산 연구에 매진하는 그에게서 선비의 모습을 보았었다. 어쨌든 망양정에 서서 하늘과 바다가 이분되는 풍경을 꽤 오랫동안 감상하였다.

두번째로 망양정이 있던 자리. 언덕 위의 망양정은 새로 지은 것이다. 과거 바다와 마주했던 절벽은 도로에 반쯤 메워지고, 바다와도 멀어진 상태이다.
망양정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바다와 하늘이 이분되는 가운데 푸른 곰솔이 사철 정자를 호위하고 서 있다.


꾸준히 해변의 길을 걸어 덕신 1리에 도착하니 5시, 어둠이 수채화의 첫 붓질처럼 번지는 시간이다. 이곳엔 내가 애정 하는 서낭당이 있다. 작으면서도 편안한 느낌, 노랗게 칠한 페인트가 반쯤 빠진 나무벽과 나무문이 주는 안정감이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곳이다. 비술나무에 등을 기댄 낡은 서낭당 안에는 용궁생막걸리 한통이 놓여 있다. 용궁막걸리는 바닷가가 아닌 경북 예천의 용궁면 용궁로에 있는 용궁합동양조장에서 만드는 술이다. 예천 용궁면의 유명한 순대국밥집에서 먹어본 경험이 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다." 명패에 쓰여 있는 신위는 글자가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서낭당을 한 바퀴 돌아보고 거리로 나서는데 할머니 몇 분이 집으로 돌아가며 작별 인사 중이다. 서낭당은 저 할머니가 고운 새색시로 이곳에 시집올 때 동구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고운 새색시가 이제는 꽃가마가 아닌 유모차에 의지해 집으로 가고 있다. 할머니의 발걸음이 따스해 보이는 건 이 서낭당 때문이 아닐까.

덕신 1리의 서낭당에는 비술나무서낭목이 있다.
덕신 1리 서낭당 안의 신위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모래사장이 길게 이어지는 오산리의 해변을 지나 바위들이 바다를 향하는 진복리 해변을 걷는다. 저기 진복방파제가 보일 무렵부터 어둠을 걷어낼 수가 없다. 마을의 집들에 불이 들어오고 띄엄거리는 가로등에도 어둠이 선을 긋는다. 이제부터는 야간 걷기를 준비해야 한다. 야간 걷기의 최우선은 나를 알리기이다. 어둠은 걷기여행자의 안전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를 대비해 야광테이프를 가방에 붙이고 다니거나 교통용 손전등을 가지고 다니는 이들도 있으나 게으른 나는 그런 것들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전에 이 구간에서 앉아 쉬는데 마침 지나가던 차가 멀리서 나를 보고는 귀신인 줄 알고 놀라 차를 멈춘 채 한참을 다가오지 못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는 빨리 일어나 걸어가며 내가 걷기여행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당황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진복리를 지나며 어둠이 짙어져 온다. 길 가의 집에서도 불을 밝히고 저녁을 준비한다


산포리를 들어설 때부터 비가 굵어진다. 어두운 길에 함께하는 가로수는 발 밑을 안내하지는 못한다. 휴대폰을 켜 한 손에는 휴대폰,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촛대바위와 마주한다. 이럴 때 조명이 없었더라면 이 바위는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되어 나를 위협했을까. 제방을 넘어 길을 적시는 파도의 기세가 더욱 거세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다. 어둠이 짙어지면 풍경들이 숨어버리고 대신 소리들이 커진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가득하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물에 적셔진 나의 발자국 소리, 가끔 바람이 몰려다니는 소리가 전부다. 파도의 교향악에 온전히 잠겨 산포 3리와 2리를 지나니 카페의 화려한 불빛이 밤을 수놓는다. 가로등의 불빛도 간격이 좁아지는 걸 보니 망양정이 가까운 거다. 망양정 해맞이 공원엔 가로등만이 빛을 내고 있다. 망양정을 오르지 않고 해맞이교 쪽으로 내려와 왕피천 하구를 걷는다. 하천 건너 울진 엑스포공원의 불빛이 가지런하다. 천천히 목책길을 걷는다. 40킬로가 넘는 길을 하루에 걷다 보니 밤길을 걸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인식도 못하고 지나쳐버린 곳들도 있지만 온전히 바닷소리만 들으며 걸은 길이었다. 이제 다음 코스를 준비해야 한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파도의 흰 빛도 짙어진다. 저러다 어느 순간 어둠만 남으려나
조명이 비추는 촛대바위 앞에서 잠시 길을 멈춘다.
어둠 속에서 거친 파도가 자신의 몸짓을 보이고, 가로등은 담담히 밤을 지킨다.
망양정공원을 지나 왕피천을 따라 걷는다. 강 건너 엑스포공원의 불빛이 어둠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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