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를 망친 돌고래 ep.15
오빠의 상황을 알고 나니 정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처리해야 했고, 짐을 빼야 했으며, 구치소에서 나오게 된다면 어디에 머무를지 결정해야 했다. 재혼한 배우자에게 아들의 소식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엄마는 적잖이 난감해했다. 자신의 짐이 아무 상관없는 이에게 나눠지면 안 된다며 가슴 졸였다. 그 넘치는 배려심은 늘 내게만 적용되지 않았다. 만만한 딸아이에게 또 한 번의 손을 벌렸다.
아빠한테 연락해 보라고? 내가 왜?
성인이 된 후, 나는 친부와의 연을 끊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정적인 줄 알았던 아비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단 걸 알게 된 후 그를 향한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자라나는 내내 나를 죽고 싶게 만든 이가 엄마였는데, 그녀를 미치게 한 게 아빠였으니 결국 그가 내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없다. 더 이상 부녀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알고도 이런 부탁을 하다니.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
전화번호부에 생물학적 아빠의 이름 세 글자를 검색했다. 이혼한 지가 언젠데 연락처 끝 번호 네 글자를 여전히 우리 가족과 동일하게 쓰는 얼척없는 인간. 삐져나오는 짜증을 꾹꾹 담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거의 10년 만에 듣는 아빠의 목소리였다. 신기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공기에서 핏줄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신체로 체감했다. 온몸의 세포들이 그를 생생하게 기억해 너무도 익숙한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상황 파악이 끝난 아빠는 제일 먼저 내 안부를 물었다. 오빠 일은 잘 해결될 거라고. 신경 쓸 것 없고 네가 잘 지내는지가 더 중요하다면서. 재미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애초에 좀 인간답게 살아보지?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탓인데." 목전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끝내 삼켰다.
그는 아들을 위해 발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명단을 받아 일일이 연락했다. 한 사람당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 남짓의 피해금. 사과와 함께 그보다 더 높은 합의금을 제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엄마가 보여준 행동은 기가 찼다. 화상 면회가 가능하다는 경찰의 말에 내게 접속 방법을 물어왔다. 전자기기 사용에 능숙하지 못해 헤매고 또 헤매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래나 저래나 아들 꼴은 제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범죄자를 위한 화상 면회라니. 그따위 인간적 대우가 왜 생겨났는지 그렇잖아도 어이가 없는데, 그것을 위해 노트북을 펼쳐드는 어미를 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말 '엄마가 엄마했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못본새 없던 성실함이라도 장착된 걸까. 아빠는 재판을 앞두고 기어이 피해자 대다수의 합의를 받아냈다. 결국 그는 집행유예로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나 홀로 가슴팍을 내리쳤다. 꼭 감옥에 들어가길 바랐는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더니 군대도, 경찰도, 법원도 자꾸만 오빠를 봐주는 것 같다. 이번에도 우리 집 패륜아 새끼는 죄에 대한 형벌을 피해 갔다. 본인의 노력 하나 없이.
그가 남의 등을 처먹어 쉽게 돈을 벌려다 구치소에서 산소만 축내고 있는 사이, 엄마는 반쯤 미쳐갔고, 아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가며 헛돈을 날렸으며, 소중한 생명은 좁아터진 원룸에서 굶다 생을 마감할 뻔했다. 무엇보다도 그 개 같은 과정 모두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양심이란 게 남아 있었다면 구치소로 끌려가는 길에 혀를 깨물었어야 했다. 달리는 차도 사이에 몸이라도 던졌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데려온 개에게 물어 뜯겼어야 했다. 멀쩡한 꼴로 세상 밖에 기어 나온 엄마 아들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고아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