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를 망친 돌고래 ep.16
가진 거라곤 도박 빚뿐이던 아빠는 이혼 후 제 부모의 집에 얹혀살았다. 처자식을 길거리에 나 앉게 할 뻔해놓고도 쉬이 정신 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새로운 부채를 짊어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일평생 검소하게 살아온 조부모님에게는 꽤 값비싼 집과 상가가 있었지만, 아들로 인해 금세 증발됐다. 결국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로한 몸을 이끌고 지방 소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아빠는 그곳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다. 정말 노동이란 걸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구치소에서 나온 오빠는 아빠와 함께 조부모님 댁에 머물게 됐다. 십수 년 전, 온갖 쌍욕을 뱉으며 박차고 나왔던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얼마 가지 못했다. 아빠는 '젊은 놈이 무슨 농사냐'며 다른 일거리 찾기를 권했고, 오빠는 '이런 시골 구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집 나갈 구실을 만들었다.
"오빠야가 거기서 지내기 불편한 갑더라"는 엄마의 말에 또 한 번 미간이 찌그러졌다. 아니, 지가 불편한걸 뭐 어쩌라고? 모든 게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삼시세끼 따박 따박 차려지는 밥상, 따뜻한 이불, 멀쩡한 팔다리까지. 제 아무리 견디기 싫은 환경이라 한들, 본인이 저지른 죗값에 비하면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의 뒤통수까지 쳐가며 범법 행위를 저질러온 아들이 겪는 고작 '불편함' 따위에 근심하는 엄마를 보니 비위가 상했다. 그래, 아무리 곱씹어 봐도 오빠를 이런 인간 말종으로 만든 건 엄마인 게 분명하다.
어느 날 오빠가 다시 대구로 돌아가겠다 선언했다. 아는 형이 있는데, 그의 밑에서 일을 배우기로 했다고. 출장이 잦은 업종이라 차를 얻어 타고 다녀야 한단다. 그러니 형의 집 근처로 이사를 해야 한다면서. 늘 자식을 보이는 곳에 두고 감시하려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망설이지 않았다. 원하는 동네로 가 집을 얻고, 보증금과 세 달치 월세를 납부해 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본인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큰 소리 낼 자격이 없다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잊을만하면 도박장에 달려가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오던 아빠와 끊임없이 그 구멍을 메꿔주던 할머니, 할아버지. 그 고초를 겪고도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던 제 부모처럼 묵묵히 상황을 수습해 낼 뿐이었다. 이런 걸 보고 거울치료라고 하려나. 그렇게 오빠의 홀로서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입주가 끝나기 무섭게 아들의 새로운 집에 방문한 그녀는 자꾸만 속상해했다. 낡고 좁은 원룸이라나 뭐라나. "그럼 지가 공부 안 해 재수도 망치고, 제대로 된 취업 한 번 안 하고, 평생 부모 등이나 처먹다 더 이상 빼먹을 게 없으니, 하다 하다 남한테 사기나 치고 다니던 새끼 뭐 이쁘다고 신축 오피스텔이라도 얻어다 줘야 하냐"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혼자 잘해 먹고살지 걱정스럽단다. 이제는 정말 이런 상황이 웃기지도 않다.
나는 22살에 독립해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월세와 공과금, 보험비, 휴대폰 요금, 교통비를 내고 나면 겨우 사람답게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용돈이 남았다. 저축이 가능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견뎠다. 그 일을 하겠다 다짐한 것도, 상경하겠다 결정한 것도 모두 내 선택이었으니,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라 여겼다. 그런 딸자식에게 틈만 나면 배달음식 같은 거 시켜 먹지 말고 저금 좀 하라며 잔소리를 퍼붓고, 뉘 집 자식들은 첫 월급 받고 선물도 사주던데 넌 어째 아무것도 없냐며 비아냥대더니. 서른 살 먹고 부모 옆 동네로 독립한 아들은 그렇게나 안쓰러운가 보다.
나도 빨리 돈 벌지 말걸, 정신 차리지 말걸, 없는 엄마 등꼴까지 다 빼먹고 영원히 갱생 못할 것 같은 나사 빠진 년으로 살다 겨우 뉘우친 척, 불쌍한 척해볼걸. 그럼 좀 달랐을까? 제 앞가림 잘하는 자식의 삶은 늘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