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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Mar 28. 2021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

혜화문에서 성북쉼터까지

경신고 담장 아래 한양도성 /  이호정 그림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들

 전시안내센터를 나와 길모퉁이를 돌아가니 새로 끼워 맞춘 성돌들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옛 성돌들 사이에서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들이 돌 틈 사이로 뿌리를 내려 성벽 군데군데 이름 모를 풀꽃들을 꽃다발처럼 달아 놓았지요.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성곽이란 무거운 돌을 쌓아서 올리는 게 일인데, 그렇게 하나하나가 쌓여 만들어진 물성은 이미 돌덩이라는 한계를 까마득하게 벗어난 듯 보였습니다. 성곽은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담장 너머 교회 첨탑이 등대처럼 우릴 맞이했지요. 그다음부터는 빌라 아래 조금, 교회 울타리로 조금, 학교 담장과 옹벽 사이에 또 조금, 그렇게 조금, 조금씩 흔적으로만 남은 한양도성의 멸실 구간이 이어집니다.


 교회 담벼락 아래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한양도성은 바짝 붙어 지은 주택 뒤로 다시 자취를 감추고, 전봇대마다 붙어있는 ‘순성길’ 표지판이 한양도성이 지나던 자리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교회 건물을 끼고 모퉁이를 돌자, 높은 축대 아래 들어선 집들과 저 멀리 보현봉 자락이 잘도 보였습니다. 그러니 옛날에는 여기도 산비탈이었겠지요. 성벽 아래로 길을 내어 옹벽을 쌓고, 하나둘 주택들이 지어지며 낡고 허물어진 한양도성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잊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성곽의 흔적이 여기서부터 경신고 담장과 옹벽 사이에 꼭 삼분의 일만큼 남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담은 한편으로 기묘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것은 과연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경신고 담장을 끼고 굽이지는 이 한 방향 길은 한양도성이 품은 수많은 길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애틋한 길이었습니다. 담장과 옹벽 사이에 옹색하게 끼어버렸지만,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순성꾼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 좁은 골목을 쨉싸게 날아오르며 지저귀는 새들 소리와 함께 온전치 못한 벽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지요.


 순성하는 사람들 몇몇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지나갑니다. 그들은 이미 드라마틱한 한양도성의 파노라마를 실컷 보고 내려오는 길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이 짧은 순성길은 그들에게도, 저에게도 한양도성이 근사하게 남은 다음 구간으로 이동하거나, 순성의 형식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간 의무적으로 걸어야 했던 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언제나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래된 성돌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던 새 돌들도, 그 틈새에 뿌리를 내린 여린 풀꽃들도, 3도 화음처럼 들려오던 오래된 성곽의 흔적들도 모두, 있었다가 사라지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쓰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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