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동 성곽마루에서 숭례문까지
눈앞에 옛 지도가 펼쳐진다
남산에서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곳은 ‘사랑의 자물쇠’와 함께 서울의 남쪽 시가지가 조망되는 N타워 쪽이지만, 우리는 순성 중이니 북쪽 데크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이쪽도 만만치 않지요. 투명난간 너머로 보이는 건 여행잡지의 표지로도 손색없을 만한 풍경이니까요. 왼쪽의 인왕산에서 가운데 백악, 그 뒤를 받치며 우뚝 선 북한산 보현봉과 아름다운 주봉의 능선들, 그리고 낙산으로 이어지는 내사산의 환상적인 마운틴 릿지….
백악에서 와룡공원을 지나 뻗어 내려온 짙은 녹음은 지금쯤 창덕궁과 종묘를 거닐고 있는 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것입니다. 녹음의 끝자락에는 창덕궁 인정전의 화려한 팔작지붕과 종묘 정전의 단순한 지붕 라인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지요. 경복궁과 광화문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북촌과 서촌, 부암동, 이화동 같은 정겨운 동네들은 산자락 아래 새까맣게 자리를 잡았고, 높은 빌딩들 사이로 청계천 맑은 물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겠지요.
눈앞에 보이는 건 눈부신 발전을 이룬 21세기 서울의 도심 풍경이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곳이 내사산을 한데 잇는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여 네 개의 대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과 네 개의 소문(소의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을, 두 개의 수문(오간수문, 이간수문)과 두 곳의 곡성*(백악곡성, 인왕곡성)을, 그리고 치성과 5개의 봉수대를 둔 오래된 도시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복개되어 아스팔트로 덮여 버렸지만, 내사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옛 물길들은 청계천으로 모여 오간수문으로, 이곳 남산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은 이간수문 밖으로 흘러 다시 만났을 테지요. 옛 물길도, 골목골목 이어지던 옛길들도 사라졌지만, 저곳 어디 즈음에 조금은 남아서 오래된 것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적인 분위기로 우리를 빠져들게 합니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고 하였습니다. 도성 밖을 그린 「경조오부도」*와 한양도성의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가 그것입니다. 그중 회사 다닐 때 보고서 쓰면서 많이 활용했던 「한양도성도」는 저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친숙했던 옛 지도입니다. 내사산은 물론 북한산과 도봉산의 봉우리까지, 거기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한강과 중랑천, 사천(모래내)의 큰 물길들까지 한양도성의 배경들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성 안쪽은 양쪽 궁궐(경복궁, 창덕궁)을 중심으로 붉은색 길과 푸른색 물길들이 동맥과 정맥처럼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한성부 5부의 경계는 붉은 점선으로, 그 아래 49개 방坊의 이름은 네모난 황색 테두리로, 가장 말단인 330여개 계契의 이름까지 빼곡하게 기록되었지요.
아이들은 유리 난간 앞에 바짝 붙어 섰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오르는 복원된 성곽 자락이 흰 명주실 타래처럼 놓여 있습니다. 도성 안의 모습이 천지개벽의 말이 모자랄 만큼 변하였대도, 저기서 복닥거리며 이고 지고 살았을 한양 시절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도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요.
그러니, 얘들아! 저기 좀 봐봐. 저곳을 우리도 가봤잖아. 여기서 보이는 것들이 놀랍지 않니?! 우리 눈앞에 서울의 옛 지도가 펼쳐져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