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정 Oct 08. 2021

역사의 선상에 선 기분

숭례문에서 돈의문터까지

서울로 7017에서 바라본 옛 서울역사 / 그림 이호정



 역사의 선상에 선 기분

 

“엄마, 답사 또 가?!”


 주말 오전 답사 갈 준비를 하며 이것저것 챙기는데 딸아이가 와서 슬쩍 묻습니다. 꼭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한 번씩 서울로 답사를 갈 때마다 아이들 눈치를 봐야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처음 1년 동안은 신이 나서 따라나선 아이들도 해가 바뀌고, 답사 횟수가 많아지면서 주말에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 싶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맛있는 짜장면과 각자 좋아하는 ‘답사기념품’(이라 쓰고, ‘장난감’이라 읽습니다.)을 사주겠노라 약속하고 길을 나섰지요.


 아이들은 마을버스 타는 일도, 지하철 환승에도 익숙해졌습니다. 역 이름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이제는 티켓팅도 척척이지요. (지금은 교통카드로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내릴 역의 이름을 일러주고 자리에 앉아 졸고 있으면, “엄마! 엄마! 빨리빨리! 여기 내려야 돼!” 하면서 아이들이 먼저 난리를 칩니다. 너희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4호선을 바꿔 타고 회현역으로 향합니다.


 이번 순성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대표적인 멸실 구간인 숭례문에서 소의문터를 지나 돈의문터에 이르는 길입니다. 회현역 5번 출구로 올라가면 바로 남대문시장 입구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곧장 ‘서울로7017’로 들어섭니다. 대규모 집회가 서울역 앞 광장을 한바탕 훑고 지나가자 서울로7017은 여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쩌렁쩌렁한 음악 소리와 함께 마지막까지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숭례문 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그제야 서울로7017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복잡한 철로들과 고압 전선들, 언제 저렇게 지어졌나 싶은 아파트 단지들, 고가도로 양옆을 가득 메운 빌딩 숲까지…. 새로운 핫 플레이스의 탄생과 함께 발 딛을 틈 없이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러 시선이 여러 각도로 교차 되고 있었지만, 둥근 화단에 심긴 나무와 화초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투명난간 너머로 보이던 ‘옛 서울역사驛舍’였습니다.


 서울로7017로 바뀌기 전 ‘서울역 고가도로’는 그 이름처럼 철도선로에 의해 단절된 양쪽 지역을 잇기 위해 건설된 고가도로였습니다. 1970년 중림동과 청파동 방향 램프가 완공되었고, 1975년 만리재 방향으로 연장되면서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노후화로 인한 안전문제로 차량운행이 통제된 후 오랫동안 철거 논의를 밟아가던 중 2017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유난히 많은 관광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바라보는 곳에는 숭례문도 있었습니다. 빌딩들로 에워싸인 숭례문은 이쪽에서도 무척 드라마틱해 보였습니다. 한 나라와 시작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세워졌을 숭례문(1398)과 나라의 역사가 저물고 이제 세상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려는 듯 화려한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진 옛 서울역사(1925)사이에는 고작 500m 남짓한 거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둘을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고개를 이쪽저쪽 돌려가며 보고 있자니, 뭐랄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고가 아래 복잡한 교차로에는 찰나의 순간에도 족히 수백 대는 되어 보이는 차량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지요. 500여년이 넘는 시간의 간극을 두고, 이 도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건축물이 고작 500여m 떨어진 거리에서 좌로, 우로 마주 서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마침 7017을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이–저를 포함해서-어떤 역사의 선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로서 배우고 공부하지만, 이렇게 눈에 보이는 실제 유구 앞에서 그와 지금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나를 주체로 한 역사적 ‘체험’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숭례문과 옛 서울역사, 그리고 거기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저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저로서는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지요.


 인공의 공간에 심어진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그늘을 드리워 주기를 바라며 서울로7017의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그렇듯 이곳의 나무들에게도 얼마간의 시간은 필요할 테지요. 집회참가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길을 따라 우리는 숭례문으로 향했습니다.

이전 11화 눈앞에 옛 지도가 펼쳐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