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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12. 2021

아이와의 여행법

돈의문터에서 인왕산 아래까지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 그림 이호정



 그리고 한 명 이상의 어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답사는 즐겁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싶을 만큼 저에게는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야 이따금 답사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겠지만, 다시는 하지 못할 일이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면 될 일을 두세 번씩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막상 돌아와서 본 사진들도 너무 별로여서 그림으로 그릴 게 없었습니다. “그때 그쪽을 갔어야 했어! 왜 이렇게밖에 못 찍었을까!” 후회하며 다시 답사 갈 일에 한숨이 나곤 했지요.


 “엄만 왜 엄마 가고 싶은데만 가?”하며 따져 묻던 아이에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던 그 날은 마음 한구석이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혼자 다녀온 적도 몇 번 있었지요.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럴싸한 사진들을 수십 장을 찍고 반나절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렇게 다녀온 답사는 뭔가 허전했습니다. 아이들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서 걷던 아이들이 사실은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들은 긴 시간 동안 그 많던 길을 저와 함께 걸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온종일 걷다가 발바닥이 뜨끔거리고, 몸이 녹초가 된 채로 지하철에 올라타면, 마침 운 좋게 빈자리가 나서 털썩 주저앉는 순간 아이들 정수리에서 뿌연 먼지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오늘 답사 어땠어?”
   “재밌었어!”
   “엄마도 재밌었어.”



 아이들은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재밌었다고 하지요. 저도 뭐가 재밌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저도 할 말 없을 때 해요. 재밌었다고…. 그러고는 꾸벅꾸벅 졸다 깨서는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경구처럼 새겨둔 문장 하나를 떠올립니다.



  어린아이가 ‘자연’에 대해 타고난 경이의 감정을 지킬 수 있으려면,
  그러한 감정을 함께 나눌 한 명 이상의 어른이 반드시 필요하다.
                                                                                       레이첼 카슨, “센스 오브 원더”, 64쪽



 저는 이 말이 꼭 ‘자연’에 국한된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명의 어른이 반드시 ‘엄마’여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어쩌면 아이와의 진짜 여행법은 그러한 감정을 함께 나눌 한 명의 어른이 지금 이 순간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는 그런 어른이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늘 어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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