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아래에서 창의문까지
산 그림자는 턱밑까지 차오르고
산 위로는 벌써 그림자가 들기 시작해 우리의 걸음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오가는 사람은 없고, 반쯤 단풍으로 물든 산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황록색입니다. 잠시 갈림길에 서서 보니 울퉁불퉁한 기차바위 능선의 암릉길이 지루할 틈도 없이 이어집니다. 그 너머로는 북한산 주 능선의 황홀한 라인이, 바로 앞으로는 백악의 산자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산들의 연속이지요. 그 아래 비탈면마다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이 저마다 한 동네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은 까마득한 내리막입니다. 덕분에 각양각색의 암릉을 지대석 삼아 위태위태하게 걸쳐진 채 뻗어 내려가는 한양도성의 성곽을 볼 수 있지요. 백악 정상에서 아이들에게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며 내려오던 중 마주 보았던 인왕의 성곽길을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입니다. 한양도성이 만들어내는 길들이 네 개의 산을 따라 이어지면서 마치 서로가 이정표가 되어 걸어왔던 길, 또 가야 할 길을 자분자분 일러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둑어둑해진 성곽 너머로 불어오는 늦은 오후의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가지고 있던 머플러를 둘둘 매주고는 걸음을 서둘렀지요. 성곽길을 따라 금방이면 내려갈 줄 알았던 창의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두 마디 오고 가던 말조차 없이 앞만 보며 내려오던 길, 성곽이 크게 구부러지면서 우리의 가야 할 곳이 저만치 내려다보였습니다.
성곽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저기 어디쯤 창의문이 있을 거였습니다. 금방 가겠구나 싶어 아이들을 독려하는 데, 아니나 다를까, 왜 없나 싶던 그 말이 지나가는 바람결처럼 들려옵니다. 산에 오면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마디씩 하게 되고, 듣게 되는 말…. 아직 멀었냐는 그 말.
돌이켜보면 지나온 길들은 순간이지만, 앞에 놓인 길들은 늘 멀게만 느껴졌지요. 지나온 산봉우리만 벌써 몇 개째인데, 숨이 턱턱 막히도록 앞을 가로막은 산들이 줄줄이 이어지면, 아직 멀었냐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내뱉어졌습니다. 그럴 때면 몇 발짝 앞서 걷던 산악회 형님들이 슬쩍 되돌아보며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말씀하셨어요.
“보이긴 저래도 가보면 금방이여!”
멀리서 보면 가야 할 길이 참 잘도 보였습니다. 그러면 산들은 유려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울창한 나무 사이로, 백색의 바위 너머로, 마치 감자밭의 지렁이들처럼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우리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한양도성의 백색 성곽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며 등산화도 없이 찾아온 우리에게 기꺼이 손짓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도 답사보단 등산 쪽인지, 오늘따라 해사한 얼굴을 방긋방긋 내밀며 모델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샷을 결코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성곽은 미끄러지듯 이어지고 아이들은 백악을 배경으로 인생 샷 하나를 건졌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시작부터 운이 좋더라니…. 그새 서쪽으로 기운 해를 따라 산 그림자가 백악의 턱밑까지 차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