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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키워드 : 감사, 죽음, 문화, 성장

by Chloe J

이 유명한 책을 이제야 읽었다. 삶과 죽음 그 중간쯤 서있는 멘토에게서 삶에 대한 의미와 인생의 소중한 것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이란 문제의 해답지를 슬쩍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루게릭은 양키스 야구선수의 이름이다. 운동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사지에서부터 힘이 빠지고 결국 호흡근육에 힘이 빠지면서 사망하게 되는 불치병이다. 병의 경과는 3~4년으로 그야말로 죽음을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고 보면 된다. 책에서 모리 교수도 제자를 만날 때마다 병의 진행이 타인의 눈에 보일정도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모리교수 본인은 매일아침 일어나 손을 얼마나 들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죽음으로 향해가는 자신을 받아들였을 테다.


나도 나이 들어간다. 분명 20대의 그 몸이 아니다. 그때는 시험으로 밤을 새도 낮잠 한두 시간이면 한 달도 견딜 수 있었다. 지금은 한 시간만 덜 자도 하루종일 피곤한 것 같다. 전에 남편과 밤에 공원 산책을 하다가 달리기 트랙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 '한 달리기' 했다며 재미로 한판 붙었다가 2걸음 후 바닥을 얼굴로 디뎠다. 내가 얼굴을 바닥에 갈고 넘어진 후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픈 척도 못하고 앉아있는데, 자존심을 걸고 나와의 달리기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남편의 뜀박질하는 뒷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내가 20년도 더 젊었던 몸상태를 생각하며 달리기를 제안한 것처럼 우리는 늙어간다는 걸 머리로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하루하루의 나이 듦을 가슴에 느끼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보통의 삶은 그렇다. 모리교수는 루게릭이라는 병으로 인해 멀지 않은 자신의 결말까지 예고하며 더없이 오늘뿐인 하루를 산다. 그에게 하루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보다 절실하게 하루를 살 수 없으니 모리의 가르침에 귀를 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 죽는다. 메멘토모리, 지금을 살라, 아모르파티, 지금 여기... 죽음과 삶에 대한 멋진 말들이 글로 여기저기 흩어져있지만 우리는 가슴속으로 나의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 어쨌거나 나는 내일도 살아있을 것 같고 내년에도 아마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같은 남자와 여전히 엄마를 좋아하는 딸과 함께 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한 시간 뒤의 내 생명을 반드시 보장할 수 있는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의 죽음과 삶에 대한 소중함은 무언가 하나를 잃어야 비로소 눈물과 함께 후회로 쏟아져 나온다. 어쩌면 나의 죽음이 소중한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보다 덜 힘들지도 모른다. 죽음과 어깨동무하고 살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일인 양 생각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우리의 문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우리 전통사회는 죽음과 함께 지냈다. 아이를 낳고 21일 동안 외부인의 출입을 조심했다거나 100일이나 돌잔치를 했던 것은 그만큼 신생아사망과 영아 사망이 많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아기가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삶의 관문이었다. 어른이 돌아가셔도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방 병풍뒤에서 죽음이 그 후손의 삶과 함께 며칠을 보내게 되고 산 사람들은 죽음을 또렷하게 목도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죽음이 숨어 다닌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400그램으로 탄생한 아이도 살려낼 뿐 아니라 삶이라고 하기 힘들어 보이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강제로 살려놓기도 한다. 죽음은 어쩔 수 없어서 생기는 것, 피할 수 있으면 가능한 피해야 할 삶의 반대말이자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라는 관념을 심어줬다. 마치 죽음이 전염이라도 되는 양 병원이라는 곳에서 꽁꽁 싸매고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한다. 병원 밖의 세상은 삶만이 지배하고, 삶만 존재하고, 삶만이 아름답고, 인정된다. 사람들은 죽음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나에게는 있어서 안 되는 생각하기도 싫은 것으로 적대시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게 되었다. 고개를 돌렸다고 다가오지 않는 죽음이 아니다. 만약 죽음과 경쟁한다면 누구도 이길 수 없다. 죽음은 삶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이 아니다. 그냥 삶이라는 상태에서 죽음의 상태로 연결될 뿐이다.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진정한 삶의 반대말이 아닐까?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죽음에 등 돌리고 사느라 오늘을 소중히 살지도 못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가치를 추구하느라 삶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돌보지 못하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고 결국 모두 빼앗긴다. 죽음 앞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일하느라 제쳐둔 가족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 함께 나눔 등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엔 유혹이 많은 세상이다. 결국 돌고 돌아 삶의 완결, 그 근처에 왔을 때 발견하게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런 게 다 문화적 소산이다. 왜 나는 학창 시절 수능이 고생의 결승점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전문직이 되어야, 대기업에 들어가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생각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그 생각은 함께 꼭대기를 향해 달려간 우리 모두의 생각이면서 어느 누구의 생각도 아니다. 나와 같았던 모두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물론 부모님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 말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핵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남들 하는 대로 하는 이유는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이고 다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게 지금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문화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당연하듯 말한다. 진짜? 왜?라는 생각 없이 계속 대세와 문화를 빙빙 돈다. 일이 잘못되면 그 수많은 흐름의 대세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단지 대세라서 따른다면 나의 하나뿐인 삶이 강물 위의 종이배 같아진다. 방향도 모르고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그러다 한 번의 물살에 가라앉아버릴지도 모를... 삶이라는 흐름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직접 생각하고 직접 판단해서 행동하고 그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인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도 늘 그렇듯 출근해 늘보던 직원들과 항상 하는 관성적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많이 봤던 이 관용구의 일상적인 오늘이 특별해지는 책이었다. 근육에 힘이 빠져 호흡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모리교수가 그토록 바라던 24시간은, 꿈이라는 단어에 번쩍 눈뜨고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나의 시간, 짧게 주어진 여유에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나의 시간, 주말 커튼 없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한 주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나의 시간, 느릿느릿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딸의 생각이 얼마나 자랐나 키재기 하는 우리의 시간, 서점과 문구점에 재고확인하듯 한 바퀴 돌고 너무 많이 봐서 눈에 익은 매장직원과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는 뻘쭘한 나의 시간... 작고 소소한 시간이 얼마나 빛나는 조각들이었나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모리교수의 14번의 수업 중 죽음, 나이 듦, 문화만 적어봤다. 14번의 수업은 14편의 에세이가 나올 만큼 책과 함께 스스로 생각할 주제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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