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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감사 이어달리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키워드 : 감사

by Chloe J

"감사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면 인사와 함께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23년도 11월, 연말로 끝을 향해 달리면서 홀수년도 건강검진은 요새 절정이다. 내시경처럼 미리 예약이 필요한 검진예약이 다 찬 것은 물론이고 이미 충분하지만 당일로 암검진을 제외한 기본검진만 하는 분들의 접수를 계속 받다 보니 8시 30분이 아니라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일은 시작된다. 문진이라는 일이 특별해지기란 쉽지 않다. 우선 첫 대사가 모두 같다.

"지금 드시는 약이나 진단받은 질병이 있으신가요?"

요즘 이 대사에 자주 오류가 발생한다. 자궁경부 검사를 하러 들어가서도 오류 난 오디오처럼 "지금 드시는....???"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대신 "지금 드시는 약...?" 사람만 보면 자동으로 나오는 내 대사에 모두 빵 터져 웃다가 "검진 AI"라는 별명이 붙었다.


문득 진짜 로봇처럼 일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AI보다 나은 게 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분이 방으로 들어올 때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인사를 하면서 문밖에 줄이 얼마나 긴지를 확인을 한다. 아픈 데가 있냐고 물었지만 그분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정보 지식 분류에서 AI가 해당 검색을 하듯 AI보다 못한 실력으로 환자의 아픔을 덮어버리고 대화를 끝내려 노력한다. 뒤로 이어진 질문은 의도적으로 닫힌 질문을 한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도록... 그래야 빨리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질문이 끝을 향해가면서 마지막 관문이 있다. 궁금한 것 있으신가요? 간혹 이 질문이 다음단계로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10년을 일하면서도 가장 묻기가 꺼려지는 질문이다. 10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성장이라면 단 하나,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었다. 첫인사만 나눠도 대응방법이 떠오른다. 하루에도 100명 넘게 만나는 손님이고 모두가 같은 국가검진을 하러 온사람이다. 지금 들어온 손님은 그동안 예외를 보여준 적 없는 수많은 분들 중 하나일 뿐이고 오늘 봐야 할 수십수백 명 중 한명일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는 2년에 한 번 만나는 검진의사다. 2년 전에 비해 달라진 건강의 모든 것이 어찌 안 궁금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매해 연말만 되면 직업에 있어서의 과정의 힘듦과 직업의식의 이중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진다.


며칠전도 그런 정신없는 연말 중 하루였다. 제일 사람이 많은 시간인 9시, 만 나이 87세 할머니 한분이 들어오셨다. 거동은 가능하지만 혼자 다니기 불편하실 텐데 보호자 없이 걸어오신 듯 보였다. 나이를 확인하고 보통 때보다 목소리 볼륨을 2배쯤 높이고 할 일인 질문을 시작했다.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서 질문이라는 단지 그냥 일을 했다. 다음 안내를 해드려야 하는데 다음 차례가 흉부방사선이었다. 경로도 복잡하고 옷 갈아입는 안내도 힘들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한번 몰아쉬고 할머니와 함께 탈의실로가 직접 준비를 해드렸다. 친절이 아니라 그게 빨리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시간 뒤 문이 열리고 그 할머니가 다시 들어오셨다. 길을 잘못 찾았다고 생각해서 바로 원무과를 안내해 드렸다. 그랬더니...

"나이가 많은데 이렇게 건강검진을 와서 부끄럽고 미안해요. 말도 많이 해줘서 고마워요. 고마워. 이뻐"

"..."


손을 잡아드리고 2년 뒤에도 꼭 오시라는 말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없는 친절이란 껍데기에 받은 감사가 너무 미안하고 죄송했다. '내가 한 일이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받을만한 일이었나?'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 생기면서 할머니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집으로 가시고 나서 일이 끝나가며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제야 해드리고 싶었던 말이 폭죽이 터지듯 생각났다. 다른 말은 몰라도 인지기능도 좋으시고 특별한 지병도 없으시니 즐거운 마음을 가지기 위해 햇빛을 많이 보라 말해드렸어야 했다.


의료현실을 탓하기 전에 진심이었어야 했다. 자동 반사처럼 나오는 감사나 배려의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담았어야 했다. 문득 내 삶에 감사의 노력을 얼마나 하고 사는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감사를 노력하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할머니에게 겪었던 미안함대신 노력을 했다면 감사함과 풍요로운 마음으로 일상의 권태를 바꿀 수 있었을까?


감사함이 내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해 줄 수 있다고 읽고 들어왔다. 그래서 감사일기를 쓰고 있다. 적어도 쓰려고 노력한다. 효과를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저녁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나에게서, 가족에게서, 만나는 모두와 닿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감사를 다 전해본 것 같다. 거기에 마음이 담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를 느끼지도 못했다. 감사하는 일상은 아직 나에게는 숙제와 같다. 이번 한 주 동안 감사에 대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생각과 경험을 섞어 글을 한편 쓴다는 것은 그 주제에 깊이 사유할 기회를 준다. 과정을 통한 내 생활 구석구석 존재하는 감사함을 찾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감사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도 없이 쓰는 형식적인 '감사합니다'라는 말과는 상관없는 진짜 감사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꺼내 생각하고 말해줘야 다듬어지고 소중해지는 보물이었다.


바쁜 일터에 파견직원이 왔다. 며칠 전부터 굉장히 젊고 예쁘고 아주 새침한 표정의 그녀가 내방 앞에서 가장 복잡한 구역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입장이 달라서 그랬겠지만 상담 중인 방문을 계속 열어서 불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불편을 느끼면서 며칠만 더 참자 생각했을 테다. 일주일 동안 감사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편견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진행 잘되게 안내해 주셔서 고마워요! 잠깐씩 의자에 앉아서 쉬세요."

눈이 마주치면 눈길을 피하던 그녀는 다음날부터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의 명찰을 확인했다. 비록 바쁜 연말이 끝나면 한참을 못 만날 수도 있지만 같은 직장 속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특히나 지금은 내 일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고 감사인사를 했다. 그녀의 표정이 달라졌다. 새침한 표정이 아니라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처음에 바쁜 이곳으로 배정되어 마음이 불편했던 그녀는 어느새 나와 함께 일하는 여기가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좋아졌다. 친근감이 생기 고나니 밝고 쾌활한 친구였다.


감사에는 타인을 바라보는 선입견을 하루아침에 지우는 힘이 있었다. 한 달을 불편하게 지낼뻔한 직장동료관계가 힘들지만 서로에게 응원이 되는 사이로 만들었다. 감사로 인해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졌다. 할머니의 감사표현이 직장동료를 향한 감사로 뻗어나갔다. 준다고 빼앗기는 게 아니고 준 것보다 큰마음을 받았다. 감사받는 사람이라는 보람이 감사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 감사는 퍼져 또 다른 누군가를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런 힘이 감사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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