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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뚜벅뚜벅

타이탄의 도구들 - 키워드 : 글쓰기

by Chloe J

학창 시절 나는 늘 시작을 잘하고 끝맺음을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일기장도 마찬가지다. 초등시절부터 엄마를 졸라 예쁜 일기장을 구입해도 앞에 대여섯 장이면 늘 흥미가 떨어져 쭉 찢어버리고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기 일쑤였다. 솔직하게.... 일기장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챌린지다. 성공 관련 책을 보면서 한 영역에서 일갈을 이룬 사람들은 하나같이 글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성공하지 못했나?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잘 담아두지 못했나? 반성하기도 했다.


일기조차도 쓰지 않고 어영부영 어른이 되었다. 독서를 하지 않던 나는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기는 쓰기를 부른다. 읽어서 아는 게 생기니 뭔가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려 몇 번의 시도를 해봤다.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한 줄도 쓰기 힘들었다. 착실하고 글 좀 써봤을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실제 내 수준은 초등학생 3~4학년 정도였다. 그랬으니 어디 가서 내놓고 배우기도 부끄러워 읽은 책의 필사만 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아이캔유 온라인 공부커뮤니티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위키 글쓰기를 시작했다. 공부커뮤니티 자체가 시작된 지 만 1년이 안된 시기였고 글쓰기모임은 모집 후 첫 시작이었다. 9개월짜리 긴 프로젝트였다. 3개월 동안 하루에 한두 줄의 글을 써보는 한 줄 글쓰기, 다음 3개월은 하루에 한문단의 글을 써보는 문단글쓰기, 마지막 3개월은 하루에 A4기준 한 장 정도의 글을 쓰는 한쪽 글쓰기가 그 과정이었다. 한 줄 글쓰기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비장했다. 이제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배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은 부끄러움을 덜어줬다. 약간은 나이가 들며 생긴 뻔뻔함도 한몫 톡톡히 해줬다. 매일 많은 사람이 보는 커뮤니티에 내 글을 올리는 게 처음에는 부끄러웠다. 2주에 한 번씩 하는 줌모임에서 멋진 글들 사이에 손들어 초라하도록 짧은 내 글을 발표할 때면 발표 후에도 한참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들 보이지 않은 화면 너머에서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장벽은 사실 장벽이 아니다. 몇 번만 해보면 누구나 넘을 수 있는 글쓰기의 문턱일 뿐이다.


그 기간 동안 글쓰기 근력이라는 것을 배웠다.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이 길러지듯이 꾸준히 글을 쓰고 양을 늘려 그 강도를 더해갔다. 할 때는 괴로움이 대부분이었던 이 과정이 글을 쓸 수 있는 근력이 되어줬다. 시작 후 9개월 나는 계속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시작할 때 많았던 동료 도전자는 대부분 9개월 동안 머무르지 못했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것은 인내심뿐이었는데도...


3개월마다 진짜 실력이 확확 올라서 다음 단계로 나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이끌어주는 리더를 믿었고 내가 따라가리라 스스로를 믿었다. 마지막 3개월의 버겁던 한쪽 글쓰기가 끝나고 나는 자유를 얻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유. 해방 전은 이러했다. 일기처럼 내 사생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에세이적 글쓰기를 했다. 책을 읽고 쓸 때는 내 생각보다 저자의 생각이 가득한 독후감상문이었고 그나마도 한두 마디 쓰면 쓸 말이 없었다. 연습의 과정을 지내오고 나자 안으로만 향해있던 글은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책 이야기는 저자의 키워드를 내 이야기로 가져와 쓰고 있었다.


내 글감은 주로 책에서 왔다. 읽다 보니 쓰고 싶고 쓰다 보면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 책은 끝이 없었기 때문에 글감을 고민할 일은 없었다. 한 책을 리뷰하고 내 생각을 적고, 다른 책을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글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진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갈증이 생겼다. 조금씩 책 없이 내 생각을 적기 시작했다. 막상 생활 에세이를 써야지! 했더니 몇 개 쓴 후 쓸게 없었다. 그러다 써보고 싶은 에피소드가 생겨서 글을 쓰면 너무나 사적인 공책에 적어놔야 할 일기 같았다. 그때부터 다이어리를 쓸 때 글감이 될 부분은 다른 색으로 표시를 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검은색 펜으로 일상의 작은 기록을 해나가다 글감이 될만한 사건을 만나면 파란색 펜으로 다시 표시했다. 자기 전 다이어리를 정리할 때 글감노트에 옮겼다. 이런 방법으로 소재의 고갈은 해결했으니 일기 같은 글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감의 선정에 기준을 뒀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풀 수 있는 것' 내가 글감 선정을 하는 방법이다. 내 일상에 밀착해 있으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 노트에 하나씩 채워나간다. 책에서 시작한 글쓰기는 에세이로 바뀌어갔고 책은 글 속에서 카메오 출현으로 글을 빛나게 해 줬다.


늘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글쓰기는 커서만 깜빡이는 하얀 화면에 키보드소리 타닥타닥 한 땀 한 땀 채워나간다. 나무를 불에 태우는 듯 한 저 소리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끝없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는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이 타는 듯했다. 그 어떤 강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돈을 받고 연재할 실력이 되지도 못했고 단지 열정과 루틴 나와의 약속이 매일 글을 쓰는 동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매일 글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주 가끔은 떠오르는 생각 특히나 힘들고 속상한 일은 글로써 정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기분도 느끼는 중이다. 글을 전혀 쓰지 않던 40년이 신기할 정도다. 한때 왜 그렇게 글을 많이 쓰냐고 그렇게 재미있냐고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루틴이 습관으로 바뀌니 그 뒤부터는 하얀 화면에 막막한 마음으로 커서를 만나는 일련의 행동이 자동이었다는 말 밖에...


그냥 했다는 소리다. 그냥 했다. 뭐가 될지 뭘 할 수 있을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시작은 단 4줄, 소박했다. 갑자기라고 말해야 하나?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던 위키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뭘 잘해서는 아니다. 내가 위키 에세이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 뛰어나지도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에 열정이 있고 위키 에세이라는 모임에 애정이 있다는 그 하나로 모임의 모두와 함께 작가로 성장 중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들과 함께 쓴다.


나는 책을 쓰고 싶다. 나의 성장기를 글로 남기고 대단할 것 없는 내 성장이 과거에 내가 그랬듯이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 오늘도 나는 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작은 성취를 이뤘는지, 이렇게 티끌 같은 성장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뚜벅뚜벅, 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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