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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Feb 26. 2024

2022년 04월 21일, 어느 봄.

나의 태몽은 작은 우물에서 시작된다.

갈증에 시달리던 엄마가 길을 헤매다 발견한 작디작은 우물, 그 속에 바닥이 환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맑고 깨끗한 물이 있을까 감탄을 하며 엄마는 두 손을 뻗었다.

그러나 퍼올린 물을 마시지는 못했다.

손바닥 가득 담겨 있는 차가운 물속에 은색으로 빛나는 아주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빙글 돌며 헤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쩌면 우물 속이 아닐까?

맑고 깨끗한 우물 속에서 평화롭게 헤엄치던 작은 물고기처럼, 내 삶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절대적인 보호를 받으며, 언제나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만이 계속될 거라고.

이 세상 모든 흉흉한 것들은 내가 살아가는 우물 속 세상과는 거리가 멀어, 영원히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일상은 어느 봄날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20대 마지막 해의 어느 날,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던 그날에 말이다.


-


평범한 오후였다.

12시에 도착한 헬스장에서 PT 수업을 받은 후, 출근 준비를 위해 탈의실 안쪽에 위치한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 헤드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을 맞으며 서 있을 때, 이상하게 조금 마음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빠르게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여유를 부릴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그러지지 않은 불안감은 두 눈을 문가로 끌고 가더니 제멋대로 시선을 그곳에 묶어버렸다.


그때였다.


검은 팔 하나가 뱀처럼 스르르 미끄러지듯 천천히 기어 나왔다.

손에 든 검은 스마트폰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

동그란 카메라 렌즈 세 개가 세모꼴로 붙어 있는 네모난 스마트폰, 그리고 가운데에 희멀건하게 그려진 무늬.

칼로 새기듯 뇌리에 박히는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굳은 몸을 움직이려 발끝부터 힘을 짜냈다.

곧 꽉 막힌 목구멍을 뚫고 나온 비명이 공간을 채웠고, 그제야 멈췄던 장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은 처음 등장할 때와는 다르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떨리는 손으로 비눗물을 씻어낸 후 샤워실 문을 열었을 때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탈의실 풍경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10분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샤워를 하다가 몰카 범죄를 당한 것 같다고 하자 선생님은 CCTV를 확인해 볼 테니 일단 준비하고 나오라고 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옷을 주워 입고 금방 준비를 마쳤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무서웠나보다.

이 방을 나가는 순간 마주치게 될 많은 눈동자들, 그중 어느 것이 범인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손에 꼭 쥔 휴대전화에 선생님의 이름이 다시 뜰 때까지 제 자리에 서서 거울 속에 비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작고 볼품없는 여자애가 넋이 나간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CCTV를 모두 확인해 봤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의심이 되는 시간대에 여러 사람이 탈의실 쪽을 드나들었고, 거리가 멀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꼼꼼히 확인해 볼 테니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말고 출근을 하라며 다독여주었다.

불안에 떠는 나를 지하주차장까지 데려다주며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신고하면 일이 커지고, 소문이 날 거예요. 그럼 헬스장 운영이 많이 곤란해질 것 같아요.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요?”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을 때, 문득 ‘만약 중간에 일이 잘못 돼서 범인을 잡지 못하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했다.

당장 신고는 미루더라도 CCTV 녹화본 정도는 내 눈으로 확인한 후 가지고 있어야 차후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빈손이었다.

선생님은 점장님이 없어서 지금은 CCTV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기다려주면 나중에 화면을 녹화해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선생님은 다시 나를 지하주차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다시 차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잡아줄 테니 나를 믿고 출근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뒤로한 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선생님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범인을 잡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신고하지 말아 달라던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또다시 헬스장 문턱을 밟았을 때는 2명의 경찰관과 함께였다.



사건 정황을 설명하고, 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최대한 자세하게 재현했다.

경찰분들이 CCTV 녹화본을 확인했고, 피해 진술서 작성까지 마치고 나자 신고는 일단락되었다.

귀가해도 좋다는 말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지하 주차장 입구 앞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아까 아는 변호사 통해서 알아봤는데 이런 사건은 확실한 증거 없이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범인을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네요.

힘들겠지만 내 얼굴 봐서 그냥 한 번만 없던 일로 넘어가 주면 안 될까요?”


나는 간절한 눈으로 부탁하는 선생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 사건 피해자요, 저라서 당한 게 아니잖아요.

다른 회원분들, 어쩌면 선생님 여자친구가 겪을 수도 있었던 일이에요.

여기서 없던 일로 지나가버리면 그 사람이 다음에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걸 다 무시하고 덮어버리면 저는 다시는 이 곳에 못 올 것 같아요.”


-


건물을 나와 사거리 신호등 앞에 차가 멈췄을 때 사건 현장 조사를 담당했던 경찰관 한 분께 전화가 왔다.

선생님과의 관계에 대해 몇 차례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 사람과의 모든 연락과 대화 내용은 기록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탈의실에 출입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전화를 끊은 직후 무수히 많은 생각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단 몇 초만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새삼 인간의 뇌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곧 얽히고설킨 생각의 실타래들이 뚝 끊어지듯 사라져버렸고, 그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강하게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무시하며 왼 손바닥에 힘을 주어 핸들을 돌렸다.

우습지만 그 와중에도 먹고 살 걱정을 하며 일터로 향했다.

혹여나 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내 일을 앗아가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


-


일하는 중에 몇 번이고 핸드폰이 울렸다.

그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둔, 오빠, 동생하며 편하게 지내자던, 한때는 친구였던 그 남자.

4년 전인 2019년에 만나 나에게 처음 운동을 알려줬던 사람이었다.

수업을 그만둔 후에도 간간히 연락해 안부를 물어오기에, 참 정이 많은가보다 생각했던 사람.

그 모든 시간과 감상이 무색하게, 이제는 마땅히 부를 호칭조차 사라져버린 그 사람이 퇴근하고 만나서 술 한잔 하잔다.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수업은 취소하고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재촉했다.

나는 두통을 핑계로 제안을 무시했고, 무사히 수업을 다 마쳤다.


퇴근길, 혹시나 집 앞에서 그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한참 골목을 돌고 돌다 집에 도착했다.

그 후, 1시간 간격으로 울리는 핸드폰을 이불 속에 넣어두고, 침대 구석에 박혀 멍하게 이불에 그려진 무늬를 바라보았다.

멈추지 않는 생각들과 함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차라리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기 30분 전, 결국 그 사람으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변명과 핑계로 가득 찬 메시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곱씹어 읽다가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고소장을 써내려갔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그렇게 몇 십번을 반복하며 긴 밤을 흘려보냈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좁은 방 안을 채웠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아침이 찾아왔다.

나는 너덜거리는 몸으로 헌 옷처럼 침대에 널브러졌다.


-


어느 날,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믿어왔던 나의 세상이 예고 없이 무너져버렸다.

2022년 04월 21일,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봄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냐며 누군가는 비웃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지루해서 하품이 날 정도로 평범한 하루의 무수한 연속.

그 하루를 가장 아끼는 것들로 채워나가야지 다짐했던 스물다섯 살의 여름.

작고, 하찮은 것들로 쌓아 올린 나의 세계는 비록 별 볼일 없는 투박한 모양이었으나, 매일같이 마주하는 순수하고 선한 마음들이 소리 없이 빈 틈 사이로 스몄다.

그러니 내게 세상은 언제나 선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감사하고 과분한 삶을 선물 받았으니 나 또한 그런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서 언젠가 구멍난 누군가의 세계를 있는 힘껏 껴안아주고 싶다고.

끝없이 소망하게 되는, 소중한 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어떤 의지나 소망과 무관하게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불행은 한순간에 일상을 무너뜨렸고,

무력감에 짓눌린 나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서는 믿어온 세상이 바스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무수한 감정들이 지저분하게 얽혀 쏟아지던 첫날밤,

그날의 감정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미처 다 알지 못한다.

그 밤, 모든 혼란한 감정들을 잠시 마음 한 곳에 가뒀다.

궁상을 떨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나를 지켜야했다.

그동안 믿어온 가치관과 신념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부서져버린 세상을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는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아주 단순하고 오래된 세상의 이치가 실현되는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그로써 다시금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소중하게 지켜온 가치관과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위해 일단은 이 사건을 잘 해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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