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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Mar 17. 2024

자백

월요일 아침 9시, 경찰서에 도착했다.

사건 담당 형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피해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형사님은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고, 약 2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사건 당일에 보지 못했던 CCTV 녹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빠른 배속으로 재생되는 화면에는 여자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가해자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들어간 지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탈의실 문을 몇 번이나 밀고 당겼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있었을까?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다녔지만 이내 스스로 답했다.

그랬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진술서 작성이 끝나자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다.

수사지원팀 소속 피해자전담 경찰관이 업무를 맡았다.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는 생각보다 다양했는데 상황에 따라 법률 지원부터 주거, 의료, 취업, 심리상담 지원까지 신청이 가능했다.

나는 법률 지원에 속하는 국선 변호사 선임 제도와 심리상담 지원 제도를 신청했다.

또 한 달 동안 신변보호 조치를 받기로 했다.

관련 서류 작성을 모두 마치고 자리를 정리할 무렵, 잠시 자리를 비웠던 형사님이 돌아와 말했다.


“가해자 이름이 A 씨 맞죠? 방금 서로 직접 전화해서 자신의 범죄사실 모두 자백했습니다.”


감정이 뒤섞였다.

늦게나마 범행 사실을 인정해서 다행이라는 마음,

그 사람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실망과 배신감.

마지막 대화에서 자신을 믿어달라 애원했던 간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뻔뻔한 사람이네요.”


‘어떻게든 범인 찾아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혹시 뭔가 착각한 건 아니에요? 지원이가 잘못 봤을 수도 있고…….’

‘아는 변호사가 그러는데 이런 사건은 범인 잡기가 힘들대요.’

‘그냥 나를 봐서 한 번만 조용히 넘어가주면 안 될까?’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술 한잔 할까요?’

‘나 아무 죄 없으면 내가 고소해도 돼?’

‘조금만 내 입장에서 생각해 줄 수 있잖아.’


그 사람이 그동안 내게 했던 말들이었다.

이 말을 내뱉던 순간의 모든 표정들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미친 걸까?’

잠시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간절한 목소리와 애절한 표정이 절절한 나머지 어쩌면 내가 잠깐 헛걸 본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랐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인생에 이런 식의 얼룩이 남는 것이 끔찍이도 싫어서.

머릿속에 끝없이 되감기 되는 사건 장면과 조금 전 눈으로 확인했던 CCTV 영상이 없었다면 나조차 스스로를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온 힘으로 진심을 연기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마주쳤던 눈과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던 손길에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결백을 주장했던 마지막 목소리는 억울함과 답답함이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게 거짓이었다.


-


형사님의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경찰서를 나왔다.

그리고 일전에 연락했던 헬스장 점장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주말에 연락하겠다던 말과 달리 감감무소식이던 점장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아직 뭐가 밝혀진 건 없지 않나요?”


 나는 가해자가 경찰에 전화해 전부 자백한 사실을 알렸고,

그동안의 수업료를 전액 환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그런 사람에게 내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헬스장 측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느끼길 바랐다.

애초에 한창 영업 중인 낮 시간, 그것도 여성 회원이 이용 중인 시간에 도대체 왜 남자 트레이너가 ‘아무 생각 없이’ 여자 탈의실을 드나들게 내버려 둔 걸까?

그 업장의 누구 하나 그것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기에 청소 핑계를 대며 당당히, 몇 번이고 탈의실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안일했던 헬스장의 운영 방식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었다.

내가 이런 점들을 이야기하는데 점장은 대뜸 말을 자르고 답했다.


“네네, 그럼 제가 환불해 드릴게요.”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 통장에 수업료 10회에 해당하는 금액이 입금되었다.

그뿐이었다.

돈을 보냈다는 문자나 이 사건에 대한 어떤 유감을 표하는 말, 혹은 사과 연락은 일절 없었다.


아무도 미안하다는 짧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아침에 원치 않게 피해자가 되어 전에 없던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이제는 사과마저 구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쯤 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져서 마지막 문자를 남겼다.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답장이 왔다.



처음엔 이 점장 역시 피해를 본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라고 자기가 고용한 트레이너가 성범죄를 저지를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 헬스장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싶었다.

전 날, 사건을 공론화한 후 상호명을 궁금해하던 수많은 메시지에 죄송하단 말로 답했던 이유가 그저 법을 지키기 위해서 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배려가 피해회복의 권리마저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인 그 사람은 당연히 제 몫의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끔 환경을 조성한 헬스장 역시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헬스장 측이 겪을 피해는 적어도 나에게 물을 것은 아니었다.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그 화살은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를 향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 사람이 샤워 중이던 나를 몰래 촬영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 테니까.


-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피해를 회복하는 것.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같은 삶을 살기를,

불안해하지 않아도, 심호흡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기를 나는 바랐다.

그렇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당사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귀찮은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점장으로부터는 제때 받을 수 없었던 것.


웃기지만 사과를 받긴 받았다.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던 사람들에게.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글을 읽은 후 ‘같은 남자로서’, ‘같은 트레이너로서’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는 동안 애꿎은 사람들이 죄책감을 떠안았다.

결국 또다시 아무 죄 없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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