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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Mar 04. 2024

애틋하고 다정한, 사랑하는 나의 세계

잠깐 눈을 붙였다 뗐을 뿐인데 날이 밝았다.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눈을 마주보다 왠지 모를 거북함이 느껴져 시선을 피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을 맞으며, 쪼그려 앉아 오늘 해야 할 일들의 순서를 정했다.


1. 경찰서 가서 고소장 제출하기

2. 헬스장 수업 수강권 취소하기

3. 새로운 헬스장 알아보기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쫓기듯이 움직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생각들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


사건이 일어나고, 지난 몇 시간동안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자책과 후회였다.


‘그러게 안 하던 운동은 왜 갑자기 하겠다고 나대가지고.’

‘애초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니까 이런 일을 당하지.’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아직도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한거 보면 진짜 어디 모자란거 아니야?’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그래.’


어쩌면 이 일의 모든 원흉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조금 더 경계하고 의심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얌전히 지냈어야 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그런 사람과 어울린 것일지도 모른다.

온갖 자기혐오가 숨 쉴 때마다 튀어나와 있는 힘껏 돌을 던졌고, 마음을 멍들게 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이런 생각을 멈춰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연히 들었던 한 정신과 의사의 인터뷰와 함께.


“흔히 성범죄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트라우마 중에 <부정적 감정>이 있어요.

이때 피해자들은 쉽게 자책과 자기혐오에 빠지곤 합니다.

문제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 원인이 된 행위를 제거하면 비슷한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자신의 특정 행위를 통제하면 평화롭고 안정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심리에서 기인한, 정말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절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닌데 말이죠.”


어떤 변화는 엄청난 양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다리를 꼬는 버릇이라든지, 입술을 물어뜯는 작은 개인의 습관부터 시작해서

남자아이는 당연히 파란색을, 여자아이는 당연히 분홍색을 좋아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편견 등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둘 중 하나를 꼭 바꾸어야만 한다면 개인의 습관을 바꾸는 쪽을 택할 것이다.

불특정 다수인 사회 구성원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나’라는 한 개인을 통제하는 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날의 나는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 갑작스레 찾아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한 자신을 보며 겁이 났었나보다.

무엇보다도 ‘살면서 이런 일을 얼마나 더 겪게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는 절망스러웠다.

그러니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어야 했다.

나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탓에 생겨난 일이었다고.

나만 잘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삶 또한 통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이딴 일도 더는 내 인생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너무나 버거울 것 같았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던 나에게 세상은 선한 곳이어야만 했다.

가끔 흉흉한 사건들이 일어나기는 해도, 스스로 조심하고 노력하면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이라 믿어왔기에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그 믿음이 깨지는 것이 싫어서 멍청한 선택을 하려 했다.

그 순간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늘 그랬듯이 나 자신이었다.


-


사랑하는 이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을 때, 나는 아파하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고 위로를 건넨다.

위로조차 꺼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는 말없이 곁에 앉아 숨소리를 맞춘다.

어떤 슬픔은 말로 다 껴안을 수 없기에, 숨죽여 마음으로 속삭인다.

‘괜찮아, 혼자가 아니야. 나 여기 있어.’

소중한 사람에게 ‘네까짓게 별 수 있니.’라든가, ‘다 네 잘못이야.’라는 식의 말은 꺼내어본 적도, 마음에 담아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칼을 꺼내 들어 이미 너덜해진 마음을 마구잡이로 휘갈겼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참 쉽게도 놓아버리려 했다.


상처를 주는 생각을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 누군가의 자랑스럽고 떳떳한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

일단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렇게 시작된 오늘이었다.

하루의 목표와 목적이 뚜렷해지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비를 마치고 나와 경찰서로 향하는 길,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정문을 통과했다.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을 때나 두어 번 들렀던, 낯설고 조금은 무서운 곳.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경찰서는 ‘죄지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평생 발을 들여선 안될 곳이라 생각해왔던 탓인지, 본관 건물 유리문을 통과한 순간, 긴장된 마음에 털이 쭈뼛 섰다.


절차는 단순했다.

민원실에 먼저 방문해서 준비한 증거 자료와 함께 고소장을 제출했다.

관련 직원분과 간단한 면담 후, 사건은 ‘여성/청소년 수사팀’으로 인계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면담을 했고, 담당 형사분이 배정되면 연락이 있을 것이라는 안내를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그 길로 곧장 헬스장에 찾아갔다.

금요일 오전에는 그 사람이 다른 헬스장에서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일부러 선택한 시간대였다.

더 이상은 그 사람과 우연으로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헬스장 안쪽에서 여자친구와 운동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었다.

눈이 마주쳤고, 이내 그 사람이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냐고 묻기에 방금 고소장을 제출하고 오는 길이라고 답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원하지 않으니, 할 말이 있으면 담당 형사님과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 사람은 억울해했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며, 무고죄로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

전부 오해라고,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내 사람’을 잃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눈을 보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적어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그러자 애원과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그 사람이 말했다.


“내 입장 한 번만 생각해 줄 수 있잖아요.”


나는 내가 여기서 당신을 얼마나 더 이해해줘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운동 중인 다른 회원들에게 대화 내용이 새어 나갈까 싶어 최대한 언성을 높이지 않고 말하려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이해이자 배려였는데 말이다.

당신이 내게 ‘아끼는 회원’이라고 말했듯, 나 역시 당신을 믿고 소중한 친구라고 여겼다.

그런 내 신뢰를 기만하고 무너뜨린 건 누구도 아닌 당신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은 단지 청소를 했을 뿐이라 주장하던 그 사람은 이 이상의 대화가 시간 낭비일 뿐임을 드디어 깨달은 건지, 점장의 명함을 건넸다.

그 길로 등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후, 음성녹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조금 전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여 분 전 이 엘리베이터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음성 녹음을 켰던 자신이 기특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억울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이내 마음이 다시 착잡해졌다.


-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기 전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은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 역시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더는 이곳을 이용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고, 남은 수업 수강권에 대한 환불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지금 타지에 나와 있어서 주말에나 대전에 돌아오니, 그때 상황을 다시 확인하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조금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고객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기가 어려운 걸까?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이번 일로 인해 피해를 볼 사람 중 한 명일테니까.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새로운 헬스장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대전에 있는 헬스장을 샅샅이 찾아 집과 가까우면서 시설이 좋은 세 곳을 추려 저장해 두었다.

부지런히 아침을 시작한 덕분에 시간도 충분하겠다, 가까운 순서대로 하나씩 방문해 상담을 받을 생각이었다.


첫 번째로 상담을 받은 곳은 시설이 깨끗하고, 주차 공간도 넉넉한 데다 기구 종류도 많았다.

하지만 탈의실 문을 열면 바로 샤워실이 눈에 들어오는 구조였다.

이곳은 나에게는 무리겠다 생각하며 두 번째 헬스장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인포데스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상담을 받고 싶은데요.”


그는 표정이 밝고, 목소리에는 열의가 넘치는 좋은 첫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민한 감정을 채 추스르지 못한 채, 깐깐한 말투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1. 탈의실 근처에 CCTV가 있는가?

2. 탈의실과 샤워실 청소는 누가 하는가, 또 언제 하는가?

3. 탈의실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헬스장 청소는 청소 용역 회사에서 고용한 이모님께서 전담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탈의실 구조를 둘러보았다.

탈의실 입구로 통하는 천막을 걷어내자 천장 위에 CCTV가 있었다.

신발장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니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의 사물함이 줄을 지어 있었다.

‘ㄷ’ 자로 줄을 지어 미로 벽처럼 배치된 길을 따라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그제야 불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1인 샤워부스가 보였다.

 

가장 민감하고 걱정했던 부분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안심한 후에야 본격적인 상담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바디프로필 촬영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는데, 이전에 약 8개월간 PT를 받았음에도 기본적인 기구 사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는 맨몸 운동을 주로 해왔어서 데드리프트가 뭔지도 몰랐고, 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자극을 느낀다는 것이 뭔지 잘 알지 못했다.

자신 있는 운동이라고는 달리기 뿐인 나에게 혼자 근력 운동을 익히는 일은 갓 태어난 아기한테 일어나서 뛰라고 하는 것과 같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겪은 사건과 현재의 상황을 모두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시간은 촉박한 데다,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는 상태이지만,

그래서 의지와 상관없이 무례한 언행이 튀어나와 당신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간절하다고,

그렇게 도움을 구했다.


모든 말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듣던 선생님은 입을 열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든다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운동을 이어서 하기로 결심한 의지가 대단하다 말했다.

또,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행동에 더 각별히 주의하며 수업을 하겠다고.

잠깐 예쁘다 마는 몸이 아니라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강한 몸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바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운 선생님과 첫 상담이 끝났다.

차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의 긴장이 풀렸고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계획한 오전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좁은 운전석 시트를 젖히고 몸을 웅크려 누웠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남아 있는 오후 일정도 무사히 소화할 수 있길 바라며.


-


후에, 누군가 내게 물었다. 정 운동이 하고 싶으면 필라테스나 요가처럼 여성 강사들과 고객이 주를 이루는 종목이 있지 않냐고.

굳이 또 헬스장을 등록할 필요가 있냐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

잠시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내 어느 선택도 잘못된 것이 없었음을, 내가 믿어온 세상은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느 날, 2층짜리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반도 못 가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 하고 돌더니 그대로 눈앞이 깜깜해져서 주저앉아버렸다.

난간을 붙잡고 몇 초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다가, 어지럼증이 가신 후에야 겨우 시야가 되돌아왔다.

‘이렇게 살아서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우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지.

기왕이면 헬스를 배워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웨이트 방법은 한 번 잘 배워두면 언제든, 어느 나라에 살든 혼자서도 몸을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그 선택의 무엇이 잘못일 수 있을까?

그저 운이 나빠 사건에 휘말린 것뿐인데.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에게 모진 말을 내뱉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어서,

지난날의 선택에 어떠한 잘못도 없었음을 밝히고자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길로 걸어갔다.

그때와 같은 시선으로,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선한 사람들을 믿으며.

나는 본래의 목적을 존중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


세상에는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마음 깊이 존경하고 또 신뢰한다.

삶이 소중한 사람들은 지킬 것이 많아서라도 유혹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공들여 노력해 온 그들의 지나온 시간을 신뢰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대부분의 올곧은 사람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고,

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흔들리는 신념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연필로 콕 찍은 희미한 점 하나.

그 작은 점 하나만으로 도화지 전체가 검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여전히 세상은 선한 것들로 가득하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지금껏 살아온 세상이었다.


애틋하고 다정한, 사랑하는 나의 세계.


이전 01화 2022년 04월 21일, 어느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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