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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에서 찬란한 기독교 문명을 만나다.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에페수스로 가다.

by 담소

고즈넉한 쉬린제 마을에서 거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도시 박물관'이라고 일컫는 '에페수스(Ephesus)'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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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수스에 도착하기 전 셀축(Selçuk)에 있는 에페수스 고고학 박물관(Ephesus Archaeological Museum)을 먼저 들러 가기로 했다.

이 박물관에는 에페수스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페수스1.jpg 에페수스 고고학 박물관

그런데 의외로 박물관의 규모가 크지는 않아 의아했는데 에페수스에서 발견된 초창기의 유물은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이후에도 비엔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왠지 힘없는 나라의 설움도 느껴진다.

마침내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정부는 유물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외로 반출된 유물을 튀르키예로 되돌려 보내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1929년에 에페수스 박물관이 설립되고 나서야 그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이 박물관에 보관되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박물관 방문 후 바로 이 유물들이 발굴된 에페수스로 갈 계획이라 박물관에서 오래 지체하지 않기로 했는데 실제 그 장소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유물들이 주제별로 분류되어 전시된 느낌인데 특히 소크라테스와 아우렐리우스의 흉상에 눈길이 간다.

아우렐리우스는 소크라테스의 흉상과는 달리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이마에 주름이 표현되어 있고 망토를 걸치고 있는데 이 망토는 황제에게만 입힐 수 있는 망토(paludamentum)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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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우스와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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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쪽에선 에페수스에서 발견된 동전이 연대순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고대 시대의 동전 주조 과정 설명도 안내되어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니 어서 빨리 에페수스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더 커져 서둘러 에페수스로 향했다



에페수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10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로 로마의 기독교가 지배를 했을 당시 전성기를 이룬 곳이지만 이후 오스만 트루크는 이곳을 정복하고 튀르키예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 도시는 한때 항구도시로 번창했으나 토사유입으로 항구가 매몰되어 도시기능을 하지 못했고 전염병이 생겼으며 지진이 많이 발생한 탓에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게 되어 결국 튀르키예의 불모지(不毛地)로 남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스만 튀르크가 이곳을 방치한 덕에 고대의 유적들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만약 이곳이 불모지가 아니고 유용한 땅이었다면 아마도 이 도시의 소중한 유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이슬람의 문화가 탄생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도시가 지금은 튀르키예의 영토가 되었지만 기독교의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기독교 성지 순례로도 유명해진 도시가 바로 에페수스다.

도시 이름 에페수스(Ephesus)와 유사한 이름을 떠올리니 성경에 등장하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 '에페수스(Ephesus)'이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이고 예수 사후에도 요한이 동정녀 마리아의 노후를 돌본 곳으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 도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에페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요충지였다. 한때 페르시아에 정복당하면서 잠시 쇠퇴기를 겪긴 했으나 이후 알렉산더 왕이 지배를 하면서 헬레니즘 문화를 융성시켰고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중해 동부 교역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린 도시이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정치와 종교, 상업의 중심지로 손꼽힐 정도의 큰 도시였는데 그 당시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대도시였던 것임엔 분명하다.

스파르타, 페르시아,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른 복잡한 역사로 이루어진 도시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수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정교할 정도로 잘 보존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도시 형태와 건축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방문해야 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드디어 2000여 년의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에페수스(Ephesus)에 도착했다.

입구엔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기념품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 관광지 분위기를 풍겼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바뀌어 고즈넉한 느낌의 오래된 소나무가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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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수스에 들어온 나는 이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에페수스는 세계 최대 고고학 발굴지로서 현재까지 15% 정도만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하니 한때 이 자리에 있었던 고대 로마 도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에페수스는 어마어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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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장(The GreatTheatre) 좌석에 앉아 웅장함과 위대함을 느끼며 먼 곳을 바라보니 아케이드가 줄 지어 서있고 대리석으로 포장된 거리(Arcadia street)가 남쪽으로 곧고 넓게 뻗어 있다.

지금은 주변이 흙과 무성한 잡초지만 과거 항구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다양한 상가가 형성되어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대상으로 교역을 하느라 활기가 찼을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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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클레오파트라도 이 거리에서 쇼핑을 했다고 하니 지중해를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항구 도시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상점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아케이드(arcad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상가가 많았던 이 대로 '아르카디아' 거리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인가 보다.

대극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극장의 규모가 크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 무척 인상적이다. 하긴 그 당시 수 십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니 이 정도 규모의 극장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런데 좌석을 보니 신분에 따라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 듯하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층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정치인과 귀족, 그리고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여기에 앉았을 것이다. 이어 중, 상류층,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들이 마지막 뒷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 높은 곳까지 소리가 전달이 잘 될까 싶어 궁금했는데 무대의 표시된 부분에서 이야기를 하면 전체에 울린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떻게 이런 현상까지 고려하며 건축을 했을지 정말 놀랍다.

지금도 이 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당시 과학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도 있었다는 설명을 보니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문득 떠오른다. 결코 흥미롭게만 볼 수 없었던 영화였는데 그 당시 이곳에서 죽어나가야 했던 사람들이 떠올라 갑자기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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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모양의 건물인 '오데이온(Odeon)'은 에페수스의 재벌이었던 푸블리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가 지었다.

현재 우리가 일컫는 '오디오(audio)'의 유래가 된 ‘오데온 (Odeon)’ 야외극장은 산의 경사를 따라 지어졌는데 약 1,400명가량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과거엔 나무로 된 지붕의 덮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었다.

자세히 보니 낮은 층의 좌석이 조금 더 넓은데 가격이 더 비싸고 아마 귀족이나 부유층이 이용할 수 있는 좌석이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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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온(Odeon)

이곳에선 연주회와 시 낭송 같은 행사가 열렸고, 의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고대 유적지에는 원형극장, 공연장, 아고라와 같은 시설들을 어딜 가나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소리'라는 성질을 잘 이용한 듯싶다.

소리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 중 하나로 사람들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일정한 장소로도 모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니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런 극장과 광장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시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선 재즈 페스티벌이나 클래식 콘서트와 같은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런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주회를 보는 게 나의 wish list 중 하나인데...



에페수스는 어딜 봐도 부유하고 화려한 공간이었는데 도시의 고급짐을 한껏 드러내는 대리석으로 포장된 중심가는 그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대로(大路)는 마차가 다니는 길과 인도가 따로 나뉘어 있었고 물론 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로에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환하게 밝히기도 했다는데 그 당시 가로등이 있었던 도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정도였다고 하니 도시 에페수스는 부유함의 최고 도시였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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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에페수스의 유적 중 하이라이트는 '셀시우스(셀수스, Celsus) 도서관'이다.

광화문이 서울을 대표하며 당당히 서있다면 이곳에서는 셀시우스 도서관이 에페수스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운 자태가 압도할 만큼 위엄이 있으며 우아함까지 갖추어 마치 궁전으로 착각될 정도다.

무엇보다 도서관의 보존 모습이 정말 잘 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랐고 볼수록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우아한 도서관처럼 생각된다.

특히 건물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니 아침 햇살을 받으면 열람실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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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수스 도서관

'셀수스(Celsus)'라는 인물은 부유하고 인기 있는 시민으로 에페수스의 집정관과 총독을 지냈는데 개인 재산으로 도서관 건설 비용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그의 아들이 건설했는데 그 당시에 책을 보관하는 장소를 이렇게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지을 생각을 했다니 학문과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걸까?

아님 부(富)의 과시나 에페수스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려는 마음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이집트의 도서관에서 파피루스 판매를 금지하자 에페수스 항구에 오는 배들의 서적을 모두 빼앗아 보관했으며 양피지를 개발하기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고트족이 침략 당시 보관하고 있던 12,000개의 양피지 장서를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서관 주변의 대리석 도로에 발모양의 표식과 여성처럼 보이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윤락가로 가는 표식이었다고 한다.

미성년자의 출입을 막기 위해 그려놓은 발모양으로 대리석에 새겨진 발 크기보다 작으면 들어갈 수 없도록 해 놓았다고 한다.

나이에 의해 출입이 허용된 게 아니라 발의 크기에 의해 출입이 정해졌다니 아이러니하고 우습다.

그런데 이 표시는 도서관 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이 당시에 성(性)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달리 무척 개방되어 있었던 듯싶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윤락가는 뒷거리 어두운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소멸되고 혹은 범죄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마치 언제부턴가 파놉티콘(Panopticon)의 상황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도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성(性)을 관리하고 감시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리와 감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성(性)이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임을 알고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었으니 성(性)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건 나만의 생각이다.

발 크기를 보니 나처럼 발이 작은 사람은 절대 들어갈 수 없었을 것 같다.ㅎㅎㅎ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도착했다.

모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 당시 공용화장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대의 수세식 화장실이다.

용변을 마치면 지하에 흐르는 물이 뒤처리를 했다고 한다.

칸막이 없이 50여 개의 변기가 디귿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2,000년 전에도 수세식을 사용했다니....

심지어 용변 후에 손을 씻는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니 이들의 두뇌는 천재였나 싶다.

로마 사람들은 길을 정비하고 하수 시설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다던데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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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화장실과 안내판


쿠레테스 거리 (Curetes Street)는 에페수스에서 가장 중요한 동맥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문까지 이어지는 고급 대리석으로 포장된 거리로 에페소스의 가장 번화가였을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행정실무와 종교업무를 담당하던 사제들을 '쿠레테스(Curetes)'라고 불렀는데 이 거리가 쿠레테스 거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매년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사제들, 즉 쿠레테스들의 행렬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횃불을 든 쿠레테스들의 엄숙한 행렬이 눈앞에 그려진다.


대리석으로 뒤덮인 도로 양편에 서있는 화려하고 정교한 대리석 건물들을 볼 때마다 감탄이 지어지며 소름이 돋는다.

거리의 파사드는 코린트식(corinthian) 양식이 만연하다. 이오니아 양식(Ionic) 보다 훨씬 더 화려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기둥의 상단이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어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 거리에 남아있는 것은 시간과 함께 서 있는 기둥뿐이지만 어떻게 고대 로마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는지 감탄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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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etes Street


멋진 아치형 건물이 눈에 띈다.

하드리아누스(Hadrians) 신전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크지 않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에페수스에서 매력적인 건축물 중 하나였다.

아치의 정면에는 행운의 여신인 티케가 있고 안쪽에는 악귀를 몰아내는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는데 무척 정교하다.

DSC03929.JPG 하드리아누스 신전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의 끝 지점에서 개선문(Gate of Hercules)을 만났다. 바로 헤라클레스의 문이다.

헤라클레스 문을 지나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화려한 그 시대의 모든 비밀이 풀리는 듯하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남성성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인물답게 헤라클레스는 사자의 머리가 보이게 든 채 사자 가죽을 걸치고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길부터는 길이 좁아져 마차가 통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위쪽 길은 일반 평민이 들어올 수 없도록 했고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신분의 벽이 아니라 신분의 거리가 실감 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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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te of Hercules 과 아스클레피우스의 막대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뱀이 얽힌 지팡이인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의 막대가 보인다. 병원이 있었던 자리인 듯싶다.




고대 가장 부유한 시민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테라스 하우스(Terrace house)'를 방문했다.

고급스러운 주거용 빌라로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발굴되고 복원되는 과정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된다.

혹시라도 비바람에 유적이 훼손될까 봐 지붕을 미리 설치하고 발굴해 가는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오전에 방문했던 에페수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발굴 장소에 직접 와보니 더욱 실감이 난다.

에페수스의 부유한 가정의 집터와 구조, 그리고 벽화들을 직접 보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비교가 되어 무척 흥미롭다.

Terrace20Houses20of20Ephesus20photo.jpg 높은 곳에서 본 테라스 하우스 전경


그 당시 일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주로 인물과 동물들의 그림이었는데 색감과 그림 솜씨를 미루어 보아 미적감각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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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부분 집에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욕조가 설치된 흔적도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냉수와 온수도 있던 흔적이 보인다.

놀라울 뿐이다.

특히 주택 내부의 대리석 바닥에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된 모자이크 작품들은 그 당시 이들의 화려한 생활을 했던 흔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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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 온수가 흐르고 중앙난방이 설치되었다는 증거와 대리석에 새겨진 모자이크


아무리 부유층들이 살던 집이라고 해도 이토록 고급지고 수준 높은 생활을 했다니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진정으로 현대적(?) 편리함과 함께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 당시와 비교할 때 과연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며 사는 걸까?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의 생활과 비교해 보게 된다.



조금 더 걸으니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가 나타났는데 여신은 왼손에 월계수를, 오른손엔 종려나무잎을 들고 있다.

원래는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를 장식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따로 길 한쪽에 떨어져 있다.

니케의 부조가 방치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니케 여신의 자태는 무척 또렷하고 선명하다.

미국의 신발제조업체인 나이키(Nike)가 이 여신을 로고로 한 사실을 떠올리며 니케의 부조를 보니 나이키의 로고와 니케의 구도가 무척 비슷하기도 하다.

나도 옆에서 사진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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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문한 에페수스는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어느 고대도시의 유적을 모두 둘러보아도 에페소스만큼 잘 보존된 곳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에페수스를 관람 후 출구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왠지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역사가 풍부한 나라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튀르키예의 노력에 우리나라도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오는 무게감일 것 같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역사와 의미가 담겨있는 것들이라 널브러져 있는 돌마저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다.

에페수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초대 기독교에 관한 서적과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에 관한 책을 읽고 와야 고대 유적지와 유물을 견학하는데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 내내 대리석으로 덮인 거리를 걸으면서 이곳이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그리고 발굴된 유적지와 유물들을 보며 에페수스 인들은 무척 화려하고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렸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유적 하나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있어 마치 수 천 년 전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걸어 다니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나도 그 시대 에페수스 사람이 되어 그들과 함께 걸어 다녔다.



이 글은 2022년 9월과 10월에 걸쳐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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