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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체질 내과의사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계속 들으려 했다.
티비에서, 라디오에서, 스마트폰에서, 유튜브에서, 카카오톡에서, 네이버에서, 넷플릭스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침묵을 못 견디고, 심심해지면 계속 그러려고 했다.
남들이 돈 버는 이야기, 정치인들이 싸우는 이야기, 사건 사고 이야기, 꾸며낸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했다.

어느 날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내 병원에 나를 찾는 사람이 없을 때,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중한 사람과의 갈등이 있을 때, 삶이 고통이라 느껴질 때.

글을 쓰자 마음이 편해졌다.
묵혀두고 외면했던 감정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남이 아닌, 마음속의 나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었다.

학창 시절 내 모든 삶은 입시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책 같은 건 읽지 않았다. 수능 언어영역 지문에 나오는 책 읽기나, 청소년 필독서 과제를 위한 책 읽기는 '진짜 책 읽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나의 마음 한구석엔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막연한 상상이 있었다. 누가 권유하거나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게 진짜 나여서 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문과체질'은 내면의 나이고,
'내과의사'는 사회적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부모의 기대에, 사회의 기대에, 남들이 성공이라 칭하는 것들에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에 느리게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진료실 안과 밖의 이야기를 혼자 써 내려가보았다. 그냥 쓰다 보면 또 새로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나의 다른 목소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았다.
완성되지 않는 글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내 감정이 담겨지는 글들이 좋은 글 같이 느껴졌다. 그런 글들은 한편 한편이 소중한 자식 같이 느껴졌다.

철학자 고 박이문 선생님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유작에서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
나는 언어를 떠난 인식을 믿지 않는다.
나는 관념론자이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그러나 편함이나 쾌락으로서의 행복을 멸시한다. "

라며 자신을 여러 의미로, 명확하게 정의했다. 그게 참 멋있었다. 난 나를 그렇게 확신 있게 정의할 수 없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고, 생각하며 나에 대한 일말의 확신은 생겼다. 내가 문과체질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온전히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이오덕 선생님이 말했듯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를 하고 싶다.
틀을 깨는 글쓰기, 솔직한 글쓰기를 할 수 있길 바란다.
펜과 종이 만으로 틀을 깰 수 있다면, 참 쉽고도 설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써낸 글을 모아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고, 승인이 되었다.
작가로서 글을 발행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내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타인의 반응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점점 좋아요 라는 반응에 신경 쓰게 됐다. 좋아요가 몇 개인지 세기 시작했다. 내가 부정적으로 보던 인스타그램의 인정 욕구 분출과 나는 다를 게 없었다.
아무도 나의 글을 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글은 내 생각만큼 인기가 없다는 걸.
주저리주저리 쓴 글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아니란 걸.
그게 꼭 좋은 것도 아니고, 정답도 아니란 걸.

내 글은 말 그대로 '자뻑'이었다.
내가 써놓고 혼자 좋아했던 글을 남들도 좋아할 거라는 건 착각이었다.
쏟아지는 텍스트 속에 남들의 눈에 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써놓고 그렇게 흐뭇하게 바라보던 내 글들은 자뻑이라는 착각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깨달았다.
그 착각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걸.
자뻑이란 건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인생 서사에서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지키고 사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만의 서사를 갖고, 각자가 주인공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만의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서사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 나의 글을 읽어주는 이가 얼마나 감사한 이인지 깨달으려 한다. 화자는 청자가 있어야만 그 존재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서 이 글은 나의 첫 구독자에게 바치는 글이려 한다.

그리고 내 글이 나에겐 다시 치유를, 타인에겐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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