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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쓴 처방전

by 문과체질 내과의사

내 병원 근처에 70세쯤 되신 노(老) 원장님의 병원이 있다. 내 전공과 같은 내과 병원이고, 개원하신 지 30년쯤 된 우리 동네 터줏대감 병원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엔 오래된 세월을 보여주듯, 요즘은 보기 힘든 종이차트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노원장님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좁은 이 동네 안에 있으며 환자들에게 그 원장님에 대해 건너 들을 수 있었다.

" 거기 원장님은 까탈스럽고, 무뚝뚝하고 그래요~"

" 그 원장님은 약만 많이 좀 처방해달라 그러면, 상태를 봐가면서 치료해야 한다고 약을 몇일치 밖에 안 줘요~"

" 그 병원, 예전에는 환자가 꽤 많았는데, 요새는 주위에 병원도 많이 생기고...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할머니들이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서 환자가 많이 줄었어요~"

그 원장님의 병원엔 엑스레이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간혹 환자들의 검사가 필요하면 내 병원으로 의뢰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환자들은 그렇게 증상이 심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럴 때 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 그 원장님, 참 깐깐하시네.. 확실한 폐렴도 아니어서, 며칠 약 써보며 치료해 보셔도 될 거 같은데.. 굳이 이렇게 보내시나..'

그 원장님이 환자들에게 처방한 약을 종종 보게 될 때도 있었다. 요즘엔 어떤 성분의 약이라도 수십 개의 제약회사에서 같은 약들이 많이 나온다. 그 원장님이 처방한 약들은 대부분 그중에서 가장 처음에 나온, 속칭 오리지널 약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전언과 그의 처방전에서, 노원장님의 고집과 깐깐함이 느껴졌었다.

며칠 전 어느 환자가 처방전을 한 장 들고 나에게 찾아왔다. 그 노원장님에게서 받은 처방전이었다.

" 제가 다녔던 병원 원장님이 나이 드시고, 몸도 안 좋아져서 이제 폐업하신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제 이 병원 다니려고 왔어요. 매달 먹는 혈압약인데, 이 처방전을 가지고 가서 보여주라고 하시네요~"

처방전엔 노원장님의 고집스런 처방 내역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빈칸엔 그의 손글씨로 적은 환자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환자가 몇 년도부터 약을 먹었는지,
수술은 어느 병원에서 몇 년도에 했는지,
약을 먹기 전 혈액검사 수치는 어땠는지,
최근 혈액검사 수치는 어땠는지
앞으로 어떤 치료계획을 세웠었는지...
꾹꾹 눌러쓴 듯한 진한 잉크자국, 그의 정갈한 필체와 가지런한 줄맞춤에 노원장님의 꼿꼿함이 느껴졌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여러 명의 환자가 노원장님이 쓴 처방전을 가지고 왔다. 모두 다 세세한 환자들의 정보가 그의 손글씨로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그의 손으로 쓴 처방전을 보며 나는 느꼈다.
수십 년 인생의 업을 정리하면서도 놓지 않는 그의 책임감.
오래되고 낡은 기록에 녹아있는 환자에 대한 애정.
자신이 생각한 기준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하는 노인의 곤조.
그리고 그것들은 오롯이 손글씨이기에 전달되는 필자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를 상상했다. 의사로서의 전성기를 지나고 이제 환자들이 많이 찾지 않는 그의 병원. 그 안에서 노안을 이겨낼 안경을 끼고, 종이차트의 기록을 처방전에 옮겨 적고 있는 모습.
3분 진료가 일상인 동네 병원에서는 이해타산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의사는 인생 중에 가장 긴 한 막을 마감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퇴근길, 우리 동네 가장 번화한 사거리에 수많은 건물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업종의 간판들 중 단연 큰 간판은 모두 병원의 간판들이었다. 기괴한 척추 모양을 하고, 건물 전체를 감싼 그 간판들을 보며 위압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와 내 동료들의 욕심을 느꼈다.

휴대폰을 열어 봤다. 화려한 삶과 광고로 점철된 SNS 앱을 열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어떤 병원 원장님은 황소 로고가 그려진 멋진 자동차 핸들을 잡고 출발하는 자신의 출근길을 보여줬다. 또 다른 원장님은 나는 권위 따윈 버린 쿨한 의사라는 듯, 혼자서 병원에 온 택배 박스를 나르고서는 직원들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오히려 꼿꼿한 권위를 가지고, 내가 생각한 치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쳐주는 원장님이 아닐지. 또는 형광색 슈퍼카와 등치 되는 원장님이 아닌, 고집스럽게 손으로 쓴 처방전이 떠오르는 원장님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날 오전 진료를 끝내고, 내가 자주 가는 청국장집 노포에 갔다. 주인 할머니가 입은 낡은 앞치마를 보았다. 그것이 담고 있는 건 폐업한 할아버지 의사의 낡은 청진기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심코 지나치던 우리 동네의 오래된 가게들이 대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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