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휴일 아침부터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아내가 기분이 안 좋은지 침대에 내내 누워있다.
오늘 아내의 기분이 안 좋은 건 6살 아들이 어제까지 하기로 약속했던 유치원 숙제를 안 하고 잤기 때문이다.
오후 내내 숙제로 아들과 실랑이를 한 아내는 어젯밤 자기 전 아들에게 말했다.
" 너 오늘 숙제 안 하고 약속 안 지켰으니까 내일 휴일에도 엄마는 하나도 안 놀아줄 거야. 아빠도 내일 놀아주지 마."
아이들의 작은 손에 힘이 생기는 순간, 펜부터 잡게 하는 지독한 사회의 교육열에 비판적인 나는 다음날 아침 아내의 요구와 다르게 아들과 아침부터 놀아주었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아들은 어제 못한 숙제를 나에게 가지고 왔다. 나와 뒹굴거리며 엄청난 뜸을 들이긴 했지만 결국 숙제를 끝내고야 말았다. 아내가 뒤에서 말했다.
" 그거 끝내고 오늘 숙제도 다 해놔야 돼.."
다 끝낸 성취감 같은 건 약속을 안 지킨 아들에게 사치라는 듯, 아내는 차가운 말을 아들에게 내뱉었다. 아들은 작은 몸에서 끓어 나오는 화를 소파에 몸을 던져 분출했다. 나는 아들을 달래려 얘기했다.
" 어제 숙제를 지금이라도 끝낸 건 아주 잘한 거고, 오늘 숙제는 아빠랑 놀고 저녁에 아빠랑 다시 하자~"
나와 아들과의 놀이는 다시 시작됐다. 오늘만은 한없이 차가운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아들과 열심히 놀아줬다. 아들이 벌써 숙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걸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들에게 힘들 때마다 찾아오는 쉼터가 되면 좋겠다고.
다음은 아들과 그림놀이를 했다. 아들은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를 스스로 그려 만들었다. 그리고 화가에겐 자기만의 사인이 있으니 아들에게 같이 만들어보자며 아들만의 사인도 만들어 그려 넣었다. 아들은 신나서 누워있는 엄마에게 그림을 보여주러 갔다.
오늘은 냉담했던 엄마와 이미 한바탕 했지만, 다시 그 자리를 찾아가는 아들을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내 방에서 둘의 화해 무드를 내심 기대했건만, 멀리서 들리는 건 아들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냉담한 목소리였다. 아들을 받아주지 않는 아내에게 화가 난 나는 침대로 갔다. 누워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엄마와 그 옆에 매달려 울고 있는 아들을 보고 얘기했다.
" 누워서 휴대폰만 보는 엄마랑 노는 거 포기하고 나와라 아들.."
나의 그 한마디는 아내에겐 날카로운 비수를 꽂으려는 마음이었고, 아들에겐 못된 엄마는 놔두고 너랑 놀아주는 아빠에게 오라는 손짓이었다.
일주일 내 미뤄왔던 아들과의 시간을 오전 내내 보내며, 두터워진 친밀감에 의기양양했던 나에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 아빠시러! 저리 가! 엉엉. 엄마랑 놀고 싶어~!"
아.. 닭 쫓던 개, 아니 아들 쫓던 아빠는 허공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열심히 아들을 놀아준 것 밖에 없는데... 당황함과 씁쓸함에 아내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은 더 이상 내 안에 자리할 곳이 없었다.
아들에게 차가웠던 아내에 대한 나의 반감.
그것이 아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묘한 아빠의 경쟁심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물음에 웃고는 있지만 내심 떨리는 마음으로 아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이랄까.
아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보내는 아내와 아들.
평일 저녁에 요리를 하고 코가 닿을 듯 옆에 딱 붙어 아들을 먹이는 아내와 그걸 받아먹는 아들.
매일밤 침대에 누워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내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아들.
내가 둘을 보지 못하는 사이에 둘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는지, 또 어떻게 갈등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엄마에겐 아들이 인생의 전부인 것, 그 둘이 보내는 물리적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내지 이틀 동안 인자한 아빠와 보내는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그 애정 섞인 시간들의 합은 어떻게든 쌓여서 잠깐 다투는 것처럼 보여도 그 관계는 내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굳건하다는 것이었다.
토요일에 인자한 아빠인 나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일요일 저녁쯤 되면 약간 지치고 예민해진 아빠가 된다. 일주일쯤 되면 나는 아내보다 더 차가운 냉혈한의 아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를 이해해 보기로 한다. 아내는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서투를지언정, 그저 넷플릭스 드라마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일지언정, 그녀만큼 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존재가 세상에 없다는 건 너무나 명징하기에.
우리 가족 셋은 오늘 짝사랑만 했다.
아들을 짝사랑하는 나, 엄마를 짝사랑하는 아들.
한 방향만 향했던 애정의 화살표가 내일은 이리저리 왕복하며 우리 가족을 더 굳건히 해주리라 믿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 셋은 외식을 하러 나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나는 알 수 없는 모성애에서 비롯된 그녀만의 고귀한 것일 거라고. 그리고 그 방식이 가끔 아들에게 힘든 날엔, 그가 쉴 수 있는 오아시스로 나는 남아있을 거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