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6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9개월이 된 지금까지, 비 오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을 제외하면 매일 산책을 나갔다. 항상 비슷한 코스로 아파트 단지를 1시간 동안 걷는 것이 전부인데, 신기하게도 두 번 이상 마주친 사람은 거의 없다. 모르는 사람 얼굴은 잘 쳐다보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 성격이라 못 알아채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산책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크게 4가지 부류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 눈짓 정도만 하고 지나가는 사람, 아기를 통해 스몰토크를 나누는 사람,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나잇대다. 나도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길에 아기가 지나가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관심이 없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왠지 초면의 아기를 뚫어져라 보는 게 실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나와 눈이 마주쳐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면 엄청난 민폐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눈짓 정도만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통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입으로 살짝 소리를 내곤 한다. 걸음을 멈출 정도는 아니고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아기와 눈을 마주친다. 우리 아기는 유독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경향이 있어서, 눈만 마주치면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이 끝까지 쳐다본다. 얼떨결에 눈싸움에 참전하게 된 그들은 아기의 강렬한 눈빛을 보며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곤 한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인 3~4시경에 산책을 나서면 내 또래의 엄마들을 마주칠 수 있다. 그들 역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거나, 눈짓 정도만 하고 지나가는데 때때로 스몰토크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대부분 아기를 통해 아기어로 대화를 한다. 예를 들면 '저기 오빠야가 지나가네? 인사하자~ 안녕~', '아기네, 아기~ 아이 예쁘다 해주자' 정작 아기들은 관심이 크게 없는데 엄마들끼리, 서로의 눈은 보지 않고 서로의 아기를 보면서 한 마디씩 건네는 것이다. 아무 눈짓도 안 하고 지나치기엔 반갑고,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하기엔 서먹한 그런 사이. 별 다른 대화는 하지 않지만 나름의 반가움과, 동지로서의 동질감, 서로의 아기가 예쁘다는 칭찬 내지는 덕담도 담겨있다. 낯가림이 많은 엄마지만 나 역시 이런 식의 대화가 은근 즐겁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좀 더 깊은 대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멀찍이서부터 아기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장난을 치다가, 가까워지면 아기가 너무 예쁘다며 몇 살이냐 묻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아기 양말을 신기지 않았다며 욕을 하고 가는 할머니, 딸 맞냐며 아들같이 생겼다고 앞담(?)하는 어르신, 피부가 왜 이러냐며 타박을 하고 가는 분들까지 참 다양하다. 걱정해 주시는 건 참 감사한 일이지만 아기를 가장 잘 알고 가장 걱정하는 건 엄마인데 무례함이 될 수 있는 한마디를 꼭 거들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 아기보다 조금 더 큰 어린아이들이 말을 걸 때가 가장 재밌고 즐겁다. 놀이터 앞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한 아이가 '아줌마! 잠깐만요!'하고 달려와서는, 아기가 너무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까꿍 놀이를 해주는데, 우리 아기는 까꿍 놀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무표정하게 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아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그 아이 손에 쥐어주며 '이걸 눌러볼래요?'라고 말하니, 얼른 눌러보며 아기의 웃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마스크 속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그 아이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았다. 잠시 후, 놀란 아이 엄마가 '아기 함부로 만지면 안 돼!'라고 외치자 아이는 황급히 엄마에게 돌아갔다. 아기야 안녕!이라는 인사도 빼지 않고.
또 한 번은, 다른 놀이터 앞을 지나는데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 되는 꽤 큰 아이가 다가와, '엄마세요?'라고 물었다. 그러다 '아, 아니 아니. 딸이에요?'라고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말이 헛나온 모양. 딸이라고 대답하자, 너무 예쁘다며 발끝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우리 아기도 신기하다는 듯이 언니를 바라봤다. 그때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다른 친구가 '너네 엄마냐?'라면서 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초등학생 엄마로도 보일 수 있구나, 생각하며 유유히 자리를 뜨는데 초등학생 친구들의 거침없는 대화와 스스럼없는 붙임성이 귀엽게 느껴져서 웃음이 픽 나왔다.
본인도 어리면서 더 어린 아기를 보고 귀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언젠가 우리 아기도 저만큼 자라나 지나가는 아기를 보며 귀여워하겠지, 우리 아이도 나 없이 하교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기의 미래를 예고편으로 미리 만난 기분.
아기가 귀한 동네에, 귀한 아기를 만나서 반갑다는 얼굴의 어르신들을 보면 '우리 부모님도 어딘가에서 초면의 아기를 마주치면 이런 얼굴을 하실까' 싶으면서 한껏 자상한 개구쟁이 얼굴을 할 엄마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내성적 성향인 나는, 아기와 조용히 한낮의 햇볕과 잔잔한 바람을 느끼며 걷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나누는 소소한 눈길, 손짓들이 반갑다. 엄마가 '가끔은 사람을 쬐어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대단한 집순이인 나에게도 하루에 한 번, 사람을 쬐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다. 햇볕만 쬐고 들어가기에는 괜스레 섭섭할 때 괜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나서본다. 아기를 키우기 전엔 몰랐던 새로운 만남, 새로운 즐거움. 오늘도 아기로 인해 한 사람 더, 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