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머니가 증손녀를 사랑하는 방식

90세 할머니와 1세 아기의 만남

by 아리

90세의 할머니와 돌을 앞둔 아기. 둘 사이에 공동의 관심사도, 공통점도 없을 것 같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과는 다른 애틋함을 가진 관계다.


우리 할머니는 20년 간 나의 주양육자였으며 건강한 신체, 자기주장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몇 년 전 고관절 골절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면서 방에서만 지내게 되니 컨디션이 저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타공인 할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할머니의 최애 손녀인 나는 친정에 갈 때마다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밤새 수다를 떨다 잠들곤 했다. 할머니가 "시집을 갔으면 신랑이랑 자야지"라고 말하면 "난 할머니랑 자려고 집에 온 거야"라고 답했다.



나의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땐 환한 얼굴로 "참말이냐"라고 했으면서 잠시 뒤에 애는 안 가지냐며 묻던 할머니. 기억이 온전치 않아도 나와 침대에 나란히 누우면 따뜻한 손으로 배를 어루만져 주셨다. 본인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동을 느낄 때마다 할아버지를 불러 만져보게 했지만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재밌었다.


아기 데리고 처음 친정에 갔을 때 할머니는 한껏 앙상해진 팔로 힘껏 아기를 안아주셨다. 낯을 가리던 아기가 품 속에서 버둥대자 크게 놀라며 나에게 얼른 아기를 돌려주셨다. 최근에 갔을 땐 아기도 혼자 앉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할머니의 정신도 또랑또랑해져 커뮤니케이션다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할머니가 아기에게 장난을 친다고 발을 잡고 악수를 하면 아기는 신이 나서 팔을 크게 휘둘렀고, 아기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할머니가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 아기는 크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아기가 울면서 투정을 부리면 할머니는 곰쥐가 온다던가, 망태 할아버지가 와서 잡아간다고 외치며 겁을 주시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 투정을 부릴 때면 할머니의 '호랑이가 온다'는 말에는 꿈쩍도 않다가, '곰쥐가 온다'고 하면 아연실색하며 이불속에 쏙 숨곤 했다 한다. 곰쥐가 대체 무엇인지 사진으로도 본 적 없지만, 이름처럼 곰만한 쥐가 오는 것이라면 호랑이보다도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나 보다. 할머니는 30년 전 나에게 그러했듯이 우리 아기에게도 진지한 얼굴로 장난을 쳤고, 나에게도 아기에게도 장난은 백발백중 먹혀들었다.


엄마 아빠와 셋이 지내는 할머니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냈다. 워커를 잡으면 거실까지 나올 수 있지만 굳이 나오지 않았다. 즐겨보던 TV도 이제는 잘 보이지 않고, 엄마 아빠와 웃으며 떠들 힘도 없으셨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와 아기가 머물던 열흘 동안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거실에서 보냈다. 거실에서 아기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면 워커를 끌고 호다닥 나와 무슨 즐거운 일이 있냐고 물었고, 집이 떠나가라 울면 어김없이 곰쥐와 망태 할아버지를 소환하러 다가오셨다. 방에서 혼자 음악 감상을 하시다가 문 앞을 지나가는 아기와 나를 보면, 자기 옆에서 놀다 가라고 불러 세우기도 하셨다. 평소와 다른 할머니의 명민함과 적극성은 가족 모두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방 안에만 있던 할머니를 나오게 하고, 걷게 하고, 웃게 만드는 조그만 존재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아빠는 집에는 나이 많은 사람, 어린 아기가 같이 살아야 좋다고 말했다. 나 역시 어린 아기를 키울 때야 말로 대가족의 장점이 두드러지는 때가 아닌가, 할머니들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는 엄마에게도, 한없이 사랑만을 줄 수 있는 할머니의 존재를 만날 아기에게도, 고되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길러냈던 자신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는 사랑의 대물림을 마주할 할머니에게도.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한 시기. 서로의 존재만으로 벅차오르는 시간.


90년의 나이 차에도 여느 관계와는 다른 애틋함이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아기와 할머니 사이의 묘한 공감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치아를 모두 뽑아낸 할머니는 건더기가 없는 유동식만 드실 수 있는데, 우리 아기는 첫니 2개가 작게 올라와 건더기가 있는 죽을 먹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아기가 본인보다 이가 많다고 웃으셨다. 아기가 배고픈 듯 칭얼대면 자신의 주식인 영양음료를 아기의 양 손에 하나씩 놓아주시기도 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한다고 하니 이번 달에 받아 뽑아놓은 노령연금을 고스란히 아기의 작은 손에 쥐어주셨다.


모든 이가 빠져 씹을 수 있는 것이 없는 몸으로, 이제 갓 이가 나기 시작한 증손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엄마도, 할머니도 가질 수 없는, 증조할머니만의 애틋함이 분명 존재하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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