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산물, 보고서
기관별 또는 기업별로 특유의 보고서 형식이 있다. 처음엔 거부감이 들 정도로 어색한 표현이나 구성이라 느껴질 수 있는데(적어도 수달은 그랬다)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보고서를 쓰는 당신보다는 보고서를 읽을 사람은 그 형식을 길게는 20년 이상 봐 왔을 사람이기 때문.
규격화된 표현과 형식들을 처음 맞닥뜨리면 불편함이 확 밀려온다. 자연스럽지 못한 문구와 형식에 끼어 맞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요자에 맞춰 진화해 온 산물일 테니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을 다루는 문서, 판단이 필요한 문서
보고서 성격별로 유형을 나눈다는 등 교과서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싶진 않다. 조직별로 다양하게 존재하는 유형을 일반화하려다 되려 자가당착으로 이어질까 봐. 다만 보고서 태생을 고려할 때 크게 두 가지 정도로는 짚고 넘어갈 순 있겠다. 보고를 받는 사람과 일상생활에 빗대 말이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종종 궁금해하는 건 '그게 진짜야?'라는 사실(fact)에 관한 것 또는 '어떻게 하면 되지?'라는 판단(judgement)에 관한 것일 테다.
사실이 중요한 문서는 시간의 순서나 발화자의 정확한 워딩 등 사실(fact), 판단이 중요한 문서는 왜(why)에 답할 수 있는 논리(logic)에 초점을 맞춰 작성돼야 한다. 행사 계획처럼 논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문서를 제외하고는 대개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진 않으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여전히 중요하다.
거꾸로 규격에 맞춰 쓰기
이론은 여기까지 하고 규격에 맞춰 요령껏 써보는 방법을 알아보자. 조금 생뚱맞지만 작곡 이야기를 해본다. 요즘은 많은 작곡자들이 컴퓨터로 작곡을 한다. 드럼 패턴을 만들고, 그 위에 피아노 코드를 얹고, 코드에 맞는 베이스와 기타, 그 외 여러 가지 악기들을 '쌓는'식으로 작곡을 한다. 보통의 송폼(songform)은 인트로-1절-후렴-브리지-2절-후렴 등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런 순서로 곡을 만들지 않고 곡의 가장 핵심인 후렴(Hook)을 먼저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파트별로 등장하는 악기들이 총망라되는 소위 '터지는 파트'인 후렴을 가장 먼저 만든다는 것. 그렇게 만든 후렴에서 코드 파트만 빼서 인트로를 만들고, 1절은 드럼과 베이스만으로 시작해 점차 다른 악기들을 추가하며 고조시킨 후 후렴에서 모든 악기를 등장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세상 이치는 분야를 막론하고 관통하는 게 있나 보다. 보고서 목차 규격을 처음부터 꾸역꾸역 맞추지 말고 내가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정성 들여 써본다. 밀도 있게. 그런 다음 '이건 보고서 문두에 넣어 왜 이 보고서를 쓰게 됐는지 소개하는 워딩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이 내용은 핵심은 아니니 뒤로 빼서 참고사항 정도로 훑어주면 좋겠다' 식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끼워 맞춰야 할 목차에 내용을 맞추다 보면 글이 억지스러워지거나 논리가 매끄럽지 못할 수 있다. 할 말을 양껏 자세히 작성해서 앞뒤 목차에 배분하다 보면 목차별로 추가해야 할 내용도 부수적으로 떠올리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