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인 복지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by young

대한민국 초고령화와 맞물려 몇년 전부터 장기요양기관이 주목 받으면서 엄청난 수의 장기요양기관들이 들어섰습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운영하던 분들이 폐업하고 그 자리에 요양원,주간보호센터를 차리는가 하면 사회복지와 관련 없는 일을 하던 사람들도 은퇴 후에 너도나도 장기요양기관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장기요양기관들을 보며 국민건강보험공단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적정한 시설과 인력만 갖추고 신고만 하면 설립이 가능했던 기존 제도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통과를 해야하는 허가제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수많은 장기요양기관들이 생겼고 특히 방문요양은 적은 자본으로도 설립이 가능하다보니 임대아파트 등 기초수급자들이 많은 지역에는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노인 인구의 증가 추세를 아득히 넘어 버린 장기요양기관의 증가로 인해 센터의 운영 동력인 이용자를 모집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작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이용자가 30명 이하인 영세한 장기요양기관이 60.5%이고 방문요양의 경우 이용자가 10명도 안되는 기관이 47.3%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용자 모집이 어렵다보니 장기요양기관들 사이에서는 이용자 유치를 위해 소리없는 전쟁을 하곤 합니다.


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초수급자를 제외하면 이용금액의 15~20%에 해당하는 일부 본인부담금을 장기요양기관에 납부해야하고,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기관에 지불을 해줍니다.


그래서 명백히 불법이지만 기관에서 본인부담금을 면제해준다고 유혹하며 이용자를 모집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본인 기관에 이용자를 소개 시켜준 사람에게 소개비를 주는 등 유인 알선을 종용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신규 주간보호센터에서 경쟁 주간보호센터 차량을 몰래 따라다니면서 이용자의 집을 알아낸 후 본인부담금 면제 등 갖가지 혜택을 제공할테니 센터 변경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또 여러 방문요양센터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의 상황을 이용해, 일하고 있는 다른 방문요양센터에서 본인의 방문요양센터로 이용자를 옮기게 해주면 요양보호사에게 소개비를 지급하겠다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지다보니 상황을 파악한 이용자들의 배짱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어른신이나 보호자가 센터에 대놓고 돈을 요구하거나 본인부담금 면제를 해달라고 먼저 요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재가복지센터를 창업하고 이용자가 몇명 없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가족요양을 하는 사람 10명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인데, 혹시 그 센터에서 1년간 본인부담금을 면제해준다고 하면 제가 이 10명을 다 거기에 등록시키겠습니다"


어이없는 제안이었지만 순간적으로 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용자는 3명에 불과했고 사무실 임대료도 겨우 내는 수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불법을 저지르고 마음이 편할리도 없고, 1년간 본인부담금을 면제해준다 한들 1년이 지나면 저들이 본인부담금을 순순히 낼리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1년이 지나면 또 다른 신규 센터에 연락하여 1년간 본인부담금을 면제해달라고 할게 뻔했습니다.


또 본인이 데리고 온 10명만 데리고 나가면 다행이지만 1년동안 있으면서 저희 이용자 중에 몇 명을 꼬드겨서 데리고 나갈 확률도 존재했습니다.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할 때도 이런 비슷한 전화는 지속적으로 왔습니다.


"나 등급 받은 사람인데, 내가 거기 입소하면 100만원정도 나온다고 하더라고. 거기서 얼마까지 나한테 줄수 있나? 옆에 어떤 센터는 30만원 준다고 하던데"


마치 여기저기 알아보고 흥정하러온 손님 같은 어르신의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 다른 센터에서 그렇게 말하던가요? 제가 신고를 해야겠는데 거기 30만원 준다는 센터가 어디입니까?"


저의 단호한 말에 어르신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뒤로도 이용자 모집이 급한 사정을 악용해 어르신들이 센터 변경을 무기 삼아 센터와 요양보호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간혹 발생했습니다.


요양보호사에게 본인부담금을 대신 내달라고 한다거나 생일상이나 명절음식 준비를 요구한다거나(요양보호사는 일반 식사제공을 제외한 특식제공은 안됩니다), 가족들의 업무까지 해달라는 등의 이야기도 합니다.


센터에게는 본인부담금 면제 요구 뿐만 아니라 명절선물이나 행사 등을 두고도 다른 센터와 저울질하며 갖가지 요구를 합니다.


얼마 전 어버이날을 맞이해 저희 센터에서 작은 카네이션을 준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 어르신 한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작년에 내가 이용했던 곳에서는 어버이날때 큰 카네이션이랑 참치 9개 들어간걸 선물로 받았단 말이야. 여기는 더 잘 주겠지?"


그 순간

'어르신, 저희는 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지 선물 제공하는 기관이 아니잖아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저희 센터의 현재 이용자 수를 보며 조용히 참치캔 세트를 주문했습니다.


장기요양기관은 지금 전쟁터나 다름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이용자를 유치하려는 경쟁으로 불법과 무리한 요구가 전방위적으로 터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의 중요한 영역이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가는 현실이 참 씁쓸합니다.






*모든 기관이나 이용자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일부 악성기관 및 이용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keyword
이전 05화실종 노인에게 필요했던건 그저 작은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