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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장발 - 롱 포니테일을 낚아채다

< 장발. 포니테일. 남자. 페미니즘. 로맨스 >

by 심재훈

장발은 좋다. 장발은 자랑이다. 장발은 감성이다. 장발은 스타벅스와 엮이면 아주 고급스런 데이빗 상이 된다. 장발은 레미제라블에서 촛대를 훔친 장발장에서 기원한 게 아닐까? 나는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창조해낸다. 원빈의 장발은 꽤 유명하지 않은가? 다만 우리에겐 빛 좋은 개살구이다. 나는 처음으로 장발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건 절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장발은 아주 관리하기 힘든 문제아와 같기 때문이다. 유럽 중세 남자처럼 금방이라도 전쟁에 차출될 준비를 한다. 브래드 피트의 장발은 아주 꾸준하다. 영화적인 뉘앙스와 블랙스완. 그의 장발은 고유하다.


만약 마돈나가 여기에 온다면 나는 그녀를 여왕처럼 모실 테다. 여성스런 장발. 장발은 더 이상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그걸 빼앗았고 급기야 여자 비슷한 무언가가 되기 시작한다. 인류의 긴 사이클이 지나고, 우리는 이제 모계사회를 옹립하고자 한다. “혁명”. “Revolution”. 요보비치가 굳이 <레지던트 이블>의 전사로 등장한 이유가 있었을까? 인류세 Miocene는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남자의 성기는 곧잘 버자니아 - ‘vagina’ - 가 된다. 이젠 여성스런 것들이 하나의 왕국이 되어 세상을 호령한다. 메리 올리버의 시.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영국의 대처리즘. 요즘엔 메르켈 같은 사람도 있으니.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애초에 에덴동산에선 아담의 갈비뼈가 추출당했으니... 이젠 그 뼛조각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와는 그렇게 구성되었고. 그렇게 진화했다. 난 이제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금세 여자인 척 가장하고 싶었다. 누군가 들이닥치면 나의 정체성은 여성에 더 가깝다고 잘 에두르기 위해서. 그리고는 최후 보루로 내 장발을 보여줄 거다.












어린 소년으로써 엠마 왓슨의 얼굴을 동경해왔고 그걸 어디엔가 꼭 대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하루 종일 시달리곤 했다. 나의 또래. 나의 친구. 엠마 왓슨은 딱 그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나에게 엠마 왓슨이었던 여자는 딱 한 명뿐이 없었다. ‘JY’. 이제는 아마 당신을 보지 못할 테니 추억으로 허공 속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당신과 비슷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으나 나는 어떤 허탈한 경계로 인해 우리가 함께 동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내 안의 순애보를 일으켜 그 비슷한 여자를 한껏 쥘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비슷한 여자와 나 사이엔 어느 정도 숨길 수 없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아마 그 비슷한 여자도 그걸 느끼지 않았을까. - ‘JY’. 어린 시절 속에 남은 흐릿한 기억은 추억이 되었고, 아름다운 이상향 같은 게 되었다. 유토피아. 유레카. 난 그래서 지금 당신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거다. ‘JY’. 이제 딱히 당신을 탓할 게 없다. 아마 단테가 꿈속에서 베아트리체를 불렀던 것처럼. 남자는 약하다. 남자는 연약하다.


언제나 여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쳇 - Chet Baker -처럼. 남자는 여자 없이는 못 사나 보다. 그래서 장발을 기르고 싶다. 카페 옆에는 도산공원이 있는데 입구 근처에 개 두 마리가 엉켜 있다. 하얀 비숑 프리제가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켰다. 순둥이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그저 물려주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귀여운 갈색 견에게 이입당했고, 돌연 남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남자다. 순둥이. 순순히. 순애보. 난 모든 걸 내어줄 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리라. 그 여자를 지키리라. 다시 중세 남자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고 있다. 장발. 흑발 포니테일. 포니테일. 포니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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