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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가 되어간다

< 변태. 취향. 사이코. 작가 >

by 심재훈

며칠 전, 나는 뮤지컬 배우를 하는 한 친구와 함께 광화문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 친구는 나에게 변태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변태적인 작가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내며 상상한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광화문 광장을 따라 횡적으로 걸려있는 전깃줄을 보면서 그것이 내 몸속의 힘줄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뇌 속의 뉴런 Neuron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모든 전깃줄이 합쳐져 광장이라는 ‘나’를 만들어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계속 변태가 되어간다. 이유를 모르겠다. 그리고 그 내 옆에 있던 동료가 말했던 ‘변태’의 의미는 무엇일까? 변태는 매우 꼼꼼한 사람이다.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작은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 작은 것에도 여러 가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기뻐한다. 그렇다. 어떤 영역이든지 더 깊게 공부하고 관찰할수록 더 작은 것들에 집중하게 되고, 그 작은 것들 사이에도 서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개취’ - 개인의 취향 - 라는 게 아닐까. 더 깊이 철학하는 사람일수록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사실들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아마 ‘변태’란 단어는 ‘사이코 Psycho’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에서 등장하는 결벽증 살인마처럼. 하지만 또 다르게도 볼 수 있다. 변태는 세상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천재 genius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의 능력이 너무나 특이해서 평범한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다. 영화 <글라스 Glass> 시리즈 - <언브레이커블 Unbreakable>, <21 아이덴티티 Split> - 에서는 세 명의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한 명은 엄청난 괴력을 소유하고 있고, 또 한 명은 다른 자아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또 다른 한 명은 탁월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변태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변태의 이 이중적인 면모는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 변태적인 기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조금씩은 이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때에는 곤충의 성장단계를 공부하면서 그 과정을 변태라고 배운다. 그러니까 변태는 유감없이 헐벗는 과정인가 보다. 무엇인가 훨훨 벗어던지는 과정이다. 내가 입고 있던 옷들과 함께 나의 마음도 벗어던지는 것이다. 여자들은 야한 장난을 치는 남자를 두고 변태라고 부른다. 어쩌면 그 말이 정확히 맞을지도 모른다. 벗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의 상체와 부끄러운 부위까지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변태이다. 그렇게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는 어느 중년 바바리 맨 처럼.





최근에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 『검은 사슴』을 읽었었다. 여자 주인공 의선은 갑자기 거리에서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해 거리의 남자들은 의선을 잡으려고 용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을 할퀴고 물어뜯고 그렇게 도망친다. 소설 속 ‘의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의선’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시키지 않았을까? 의선은 아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굴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았을까? 까끌까끌한 목폴라의 조여옴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았을까? 세상의 원초적인 두렴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 아니었을까? 아무 일이 없어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느끼니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고뇌이자 불안 자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씩 스스로 변태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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