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교시 Mar 20. 2022

사회생활 좀 하는(?) 8살

일 학년 교사의 시간, 일교시

1학기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예전 나 학교 다닐 적만 해도 수, 우, 미, 양, 가가 과목별로 적혀있고, 행동특성에 나에 대한 핵심표현이 자필로 두어줄 정도 쓰여있었는데, 요새 성적표는 그렇지가 않다.

학부모님 입장에서는 도통 '그래서 우리 애가 잘한다는 건지, 못 한다는 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식어 가득한 성적표가 발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발송하는 성적표 양식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각 교과에 대한 교사의 평가와 전체적인 그 아이에 대한 설명을 보고 아이는 스스로 잘한 점을 칭찬하고, 목표를 세워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한 자기 발전을 위한 칸이 마련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이 성적표를 '배움 성장 알리미'라고 부른다.


그. 러. 나. 이 '배움 성장 알리미'를 채워나가는 시간은 꽤나 난이도가 높은 시간이다. 1학년은 늘 엄청(?) 나니까.


"선생님, 2학기 목표를 세우는 게 뭐예요?"

 "음! 지선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이루고 싶은 거에요~ 받아쓰기 100점 맞기 같은 것도 있고, 줄넘기 100개 넘기 같은 것도 돼요."

"책 100권 읽기도요?"

"그럼~"

"반찬 100가지 먹기도요?"

"음?  그런가..? 편식했으면 골고루 먹기 같은 거면 괜찮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무슨 음식 좋아해요?"

"선생님은~ 미역국!"

"와아! 나도 미역국 좋아하는데!"

(아차, 말렸다.)

"자자! 선생님에 대해서 물어보지 말고~  얼른 쓰세요~"

"키 크는 것도 돼요?"

"네~ 키 크는 것도 되는데 키가 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거기에 쓰는 거에요."


내 딴에 피드백을 하고 둘러보면 아이들은

'골고루 먹고 100쌘키 되기'(정말 '쌘키'라고 쓰여있었다. )와 같은 대답부터 어디서 들었는지  '놀고먹는 건물주'가 되겠다는 아이도 있다.


'얘들아... 이거 2학기 목표인데.....'


그렇게 한참을 다시 설명해가며 아이들과 목표를 적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네, 1학년입니다."

"선생님, 나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선생님 차 OOO 맞으시죠? 지금 연락 안 되신다고 교무실로 찾아오셨어요."

"네? 수업 중이라.... 아,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학교 주차장에 멀쩡히 주차해놓은 차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얘들아, 다 쓴 친구들은 잠시 쉬는 시간 가지세요. 선생님 3분마아아안!"


후다닥 교실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복도에 나가자 창문 너머로 내 차를 둘러싼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헉!!"

"죄... 죄송해요.. 나가려다가 후진으로 박아서요... 죄송합니다."


외부인이 차를 후진하다 내 차를 콕!... 아니 콰직- 하고 박았다.

그분은 연신 고개를 숙이시며 죄송하다고 하셨다.


아직 채 할부도 끝나지 않은 나의 뉴카..ㅠㅠㅠㅠ

잠깐 동공 지진이 왔지만,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쩌랴...

꾸벅 인사와 함께 명함만 받아 들고 교실로 향했다.


그 새를 못 참고 복도에 빼꼼 얼굴을 내밀던 녀석 하나가 날 보더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쏙 숨긴다.


"얘들아~ 다 썼어요?"

"선생님, 어디 갔었어요?"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으응, 누가 선생님 차를 박았대요. "

"헤에!!! 정말요?? 0_0?? 


아이들은 토끼눈이 되어 날 바라봤다.


"선생님,,슬프겠다."

"선생님, 속상하겠다."

"선생님, 차 찌그러진거 구경가도 돼요?"  (훈이 너어?!!)


아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나를 위로(?)했다.


하하... 괜... 찮.... 아...


멍-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뒤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얘들아, 배움 성장 알리미 다 쓴 친구들은 선생님에게 주고 화장실 다녀오세요~."


그렇게 받아 든 배움 성장 알리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푸하하하하, 호야, 이거 2학기 목표 맞아요?"

"네! 선생님 차 고장 났으니까 차 사줄 거예요."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얘들아, 목표는 꼭 이뤄야 한다. 알았지?)

배시시 웃고 있는 나에게 지영이도 질세라 자기 배움 성장 알리미를 내민다.



"푸하하하하하하핳, 2학기 목표가 선생님이랑 미역국 먹기이면 어떻게 해~"

"헤헤. 선생님 좋아요."

"아까 그래서 선생님 무슨 음식 좋아하나 물어본 거예요?"

"네!"


2학기 목표를 적는 그 시간, 내가 뭐라고 자기들 성적표에까지 쓰는 걸까. 그 과분한 사랑이 고마웠다.

찌그러진 차 덕분에 즐거운(?) 추억이 생겼다. 그래, 차야 찌그러졌으면 피면 되는 거지. 이런 추억은 돈 주고도 못 받는 사랑이니까.





추신: 이 귀여운 메시지는 차마 부모님께는 보내드리지는 못했어요. 아이들에게 마음만 받겠다고 한 뒤, 2학기 목표를 다시 써 보았답니다.


*글에 나오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

 

이전 13화 쉬는 시간, 그들이 몰려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