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지 못했던 말
안개가 자욱이 끼던 주말 오전
한 시간 반 거리의 시댁에 다녀왔다.
시댁 어른들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보냈고
아이는 여느 때와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자신의 웃음소리 하나, 울음소리 하나에도 번개처럼 반응하는 조부모의 사랑 가득한 표정.
어른인 내가 봐도 저리 넘치도록 흘러나오는 사랑인데
기가 막히게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을 가려내는 아이의 눈에는 얼마나 절대적인 사랑으로 보였을까.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한 나라의 임금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위풍당당하다고 해야 할까.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아이는
마법 재능을 이제 막 깨달은 어린 마법사가 지을법한 표정으로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맘은 이러했다.
저리도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을 짓는 아이인데 집에서는 저 표정을 못 짓게 해 줬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
그리고 규칙 같은 건 없이 온전히 아이의 행복에만 맞춰진 하루에 어딘가 언짢은 마음.
불편한 것은 그저 바닥에 얕게 깔린 조그만 감정일 뿐이었으나
하루가 지나서야 그 찌끼 같은 마음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야 말았다.
때는 아이의 하원시간.
잠깐 들른 편의점에서 아이는 계란, 그리고 단 요거트를 골랐고
단 음식은 먹이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요거트는 거절한 뒤 계란만 허락했다.
여느 때였으면 엄마의 설득에 납득하고 스스로 계란만을 계산대에 올려두었을 아이가
웬일인지 요거트를 계속 찾으며 떼를 썼다.
평소 아이를 예뻐라 하시는 편의점 사장님이 아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내밀어도 소용이 없다.
"엄마 너-무해!"
"짜근 요거트 어디써어-!!"
그저 아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이건만
엄마는 바로 전 날의 하루가 떠오른다.
눈물 한 방울 혹은 애교 한 마디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었던 어제의 아이.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나이에 맞게 떼를 쓰는 이 아이가
어제의 왕 놀이를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돌연 화가 치민다.
아이의 떼를 받아주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섰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뒤따른다.
"제바알- 안아주세요..!"
집에 와서도 화는 풀리지가 않는다.
물론 아이는 집에 오는 간에도 집에 와서도 안아주지 않았다.
평소에도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다 아이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면 안아주는 편이지만
오늘은 그런 교육적인 면에서 안아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애써 화를 누르며
가지지 못한 것에 분노하는 것보다 가진 것에 행복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아이는 떼를 그치고 평소 엄마와 하던 대로 울음을 참아보고 숨을 다스려 보더니 말한다.
"엄마 미안해써요- 안 그러께요 다음에느은-"
이상적인 아이의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엄마의 분은 삭혀지지 않았지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쳤고
아이도 그에 맞는 대답을 했으니 더 이상의 쓴소리 없이 화장실로 데려가 아이를 씻겼다.
아직 배변훈련이 완벽히 되지 않은 아이이기에
떼를 쓰며 울다가 속옷에 소변을 조금 지렸고
그로 인해 아이의 울음은 샤워가 끝날 때까지도 조금 더 이어졌다.
아마도 아이를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는 엄마의 손길에서 화가 느껴졌으리라.
아이는 칭얼거리는 소리와 눈물, 그리고 안아달라는 말을 좀 더 이어가다
결국에는 동생을 밥먹이는 엄마 근처인 소파에 말없이 홀로 누워 울음을 삭혔다.
아이가 조금의 훌쩍거림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나지막이 알리고 있는 것을 알았으나
전 날부터 줄곧 화를 삭여온 엄마는 좀처럼 아이를 품에 안고 너그러이 달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에게 화를 내지도, 아이를 품어주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둘째를 밥을 먹이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숟가락을 쳐서 밥을 흩뿌려버린 둘째에게 애써 눌러온 화가 툭, 터져 나왔다.
"아이.. 씨.. 정말.... 하.."
웬만한 장난이 섞인 이놈- 소리에는 울음을 보이지 않는 둘째 건만
오늘은 엄마의 꾹꾹 눌러온 화가 느껴졌는지 히끅히끅 울음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첫째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엄마! 왜 화가 나써~?"
그러더니 눈치만 보며 오지 못했던 엄마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호다닥 옮긴다.
"동동- 맘마 머거야지-"
"우르르- 까꿍!"
동생을 달래며 밥을 먹으라 권하기까지 한다.
아이의 모습에 부글거리던 화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부끄러움이 빠르게 뒤를 따른다.
아이가 울음을 이어가고 있을 때 나는 물어봐주지 못한 말.
'왜 화가 났어?'
우는 아이를 보며 한 번은 물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으나
옹졸한 내 마음이 그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묶었었다.
그런데 훌쩍이며 내 눈치를 보던 아이는
너무도 쉽게
그리고 너무도 밝게
나에게 물어왔다.
왜, 화가 났냐고.
자신의 서러웠던 감정은 가볍게 내려두고
엄마에게 말 걸 건덕지가 생겼다는 것이 그저 기쁘다는 듯이
팔랑팔랑 물어오는 아이의 목소리가
이 집에서 가장 긴 세월 살아온 사람의 마음을 쥐구멍에 몰아넣는다.
나도 언젠가는 이 아이처럼 재는 것 없이 맑았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이 세상 모두가 이런 순수한 시간을 한 번쯤은 보냈을 텐데.
아이와 나는 미안했다-는 사과를 주고받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엄마랑 나눈- 칭구자나- 구치? 내 말 마찌?"
피식.
"그래! 풀이랑 엄마는 친한 친구지!"
너의 가장 가까이 붙은 친구가 되어 나도 너의 순수함이 조금은 묻고 싶다.
저 순수함을 나의 옹졸한 맘이 망쳐버리지 않기를.
가장 나이는 많지만 가장 어른답지 못한 엄마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성장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