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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컴컴한 거.

by 풍또집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아침이면 아이들을 방에서 조용히 데리고 나가

내가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출근이 늦은 남편을 둔 특장점이다.)



어느 날은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 잠에 깼다.

"아빠!!!!!!!! 놔줘!!!! 놔줘!!!"



웬만해선 화를 잘 안 내는 남편이건만

오늘 아이가 꽤나 말을 안 들었는지 훈육을 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둘째가 같이 방에서 자고 있나 살펴보니

둘째가 침대에 보이지 않는다.

둘째가 거실에 같이 있다면 훈육이 쉽지 않을 거 같아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역시나 아이를 붙잡고 훈육 중인 아빠 다리에 달라붙어 있는 둘째.

서둘러 둘째를 안고 첫째 시야에서 조금 벗어나 훈육 장면을 지켜본다.



"아빠 놔줘.. 놔줘... 놔줘어!!!!"

잔뜩 짜증이 난 아이를 잡은 단단한 아빠의 손에 아이는 더욱더 몸부림친다.

화가 나면 아이는 발을 구르곤 하는데 그 발에 맞으면 순수하게 아파서 화가 날 정도이니

나도 항상 아이의 몸부터 제지하고 본다.



진정하면 놔주겠다는 말 한마디를 던진 채 묵묵히 아이를 붙잡은 아빠의 손

그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아이는 "놔줘."라는 말만을 반복한 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평소 자상하기만 한 아빠이기에 아마도 당혹감으로 아이의 떼 부리는 시간이

두 배는 길어졌으리라.



처음 한동안은 놔달라는 말만 하던 아이가 이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내 방법을 바꿔본다.

"아빠가 놔주면 그다음에 진정하께요-!!"



부모의 말에 무조건 Yes 하는 것이 아니라

딜을 했으면 좋겠다는 남편의 바람대로

아이는 아빠에게 거래를 걸어온다.



하지만 아빠가 이번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진정하면 놔줄게."



"아빠 살사알- 천천히 놔줘어-"

"소중한 풀이자나..!!"

이번엔 아빠의 죄책감도 건드려보는 아이다.



와,

이번에야말로 아이의 승리다 싶어 남편의 얼굴을 봤는데 미동이 없다.



'오, 오늘 정말 결심했는데?'

놀라운 맘을 가지고 지켜본다.

(나중에 물어보니 남편은 아이의 발을 제지하느라 '소중한 풀이잖아'라는 말은 못 들었다고 한다.)



이 마저도 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이는 숨을 고르고 진정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3살이 되려고 하는 어린 아이에게 한 번에 흥분을 가라앉히는 일이 쉽지는 않을 터.

숨을 고르다가도 돌연 다리를 구르고,

다시 숨을 고르다가 비명 같은 울음을 한 번 뱉어내고,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 정도 아이가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뱉을 수 있게 됐다.

"아빠 안아주세요오.."



비로소 아빠가 팔을 벌리니 아이가 그 품에 쏙 안긴다.

아이를 붙잡았던 그 팔에 똑같이 들어가는 건데도

이번엔 굴에 들어간 다람쥐 같이 폭 들어간 모양이 귀엽기만 하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품인데 저렇게 은신처 마냥 쏙 들어가고 싶을까.'



내가 사랑하는 두 남자의 씨름을 보며 놀라운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편의 단호함

둘째는 아이의 말



32개월인 아이는

입을 떼고 단어를 두어 개 정도 붙여 제법 문장답게 말하네 싶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꽤나 다양한 어휘를 적절히 구사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어휘로 생존에 필요한 말을 구사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표현한다.



[진정-하다]

이런 단어는 아이에겐 조금 낯선 어휘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웬만하면 어른의 단어를 그대로 아이에게 쓰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는 단어의 뜻을 물어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적절한 상황에 갖다 붙여 쓰고, 적절한 문맥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렇게 다소 어른스러울 수 있는 단어 사용을 보면서도 아이가 많이 컸구나 하는 걸 느끼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흥분한 상황 속에서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자신을 표현해 내는 아이가

참으로 쑥 커버린 느낌이었다.



'이젠 다 컸구나.'



그런데 이렇게 한 바탕 난리를 친 뒤

아이가 아빠에게 안겨 어리광 부리며 말한다.

"까까우유 줘."

*까까우유: 시리얼이 들어간 단백질쉐이크



아빠는 피식 웃으며 답한다.

"까까우유? 그래 까까우유 줄게. 가자!"



우리 집에 있는 소위 '까까우유'는 두 종류가 있다.

보라색 까까우유와 검은색 까까우유.

(사실 갈색에 가깝다.)



"어떤 색 까까우유 줄까?"

"음...... 보라색 까까우유!"



".. 아니다!"

부엌으로 사라진 두 사람이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목소리만 들리는데도 미소가 보이는 목소리로 아빠가 답한다.

"아니야? 그럼 무슨 색?"



"어... 어..."

"깜깜한 거!"



푸하하!

부부는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풀아, 검정색이 생각이 안 났어?"

"어어! 검정색! 검정색 머그꺼야."



좀 전까지만 해도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취소다.

내 아기는 아직도 아기가 맞다.



아직도 아기임에도

나름대로 형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일까.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는 내 첫 번째 아기가 참 사랑스러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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