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주중에 나의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거진 엄마뿐이다.
아빠는 출근이 늦고 퇴근도 늦은 사람.
아빠는 아이가 깊게 잠들고 나서야 집에 오기에
어린이집 등원 전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나면 다시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아빠를 볼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아이는 집 안에 유일한 어른인 내게 말했다.
"속땅해."
"어른이 많지가 않아서 풀이는 눙물이 날 거 가타."
동생 밥을 먹이던 엄마에게 돌연 꺼내놓은 아이의 속마음에는
명확한 원인과 결과의 값이 적혀있다.
그리고 아이가 제시한 단 한 개의 원인엔 여러 꼬리표가 붙었다.
어른 하나를 독차지하고 오롯이 예쁨 받을 수 없어서,
그리고 혼자서 아이 둘을 봐야 하는 엄마 맘에 여유가 떨어지는 만큼 자신에게 던져지는 화는 늘어나기에.
그래서,
우리 집에 어른이 엄마 하나뿐인 것에 속상했을 터.
아이의 마음이 뻔히 보이고
안쓰러운 맘과 죄책감이 고개를 들지만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 달래지도록 행동을 바꾸는 것이 영 쉽지가 않다.
신 같이 전지전능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지만
나는 그저 너무나도 인간적인 한 사람.
몸 하나를 가지고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는 아이 둘을 쫓으려니
평소에 남에게는 잘만 되는
"그럴 수 있지."
이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는 나오지를 않는다.
세상에 경험해 본 것보다 새로운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내 아이들에게
집안 구석구석 흥미롭고 신나는 것이 가득하지만
웬만한 것은 다 익숙하고 단조롭게 느껴지는 엄마에게는
그저 모든 게 어지럽혀지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하는 일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신나서 여기저기를 누비는 아이들에게 나오는 소리는
"하지 마."
"하지 말랬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세 가지 중 하나일 때가 많다.
내가 위 세 가지 말 중 하나를 골라 뱉지 않더라도
엄마의 표정을 기가 막히게 읽는 나의 아이는 미리 선수를 치곤 한다.
"엄마, 지금 나쁜 표정 하는고야?"
혹은 조용히 기죽은 표정.
아이는 그저 세상을 배우는 것인데
그냥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과 표정이 그에겐 얼마나 부당한 것일까.
그 부당함에 당당히 목소리를 낼 때는 피식 웃어넘기지만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조용히 움직이던 손을 내리는 날이면
난 참 나쁜 엄마라는 생각이 아이가 잠든 뒤에야 밀려온다.
어른이 많지 않아 속상하다던 그날은
아이의 눈치가 빼또롬한 날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보다가
결국에는 속상한 맘이 터져 나왔고
못난 엄마는 그 맘을 알면서도 마음이 설익어 아이의 마음보다는 지친 자신의 마음에 눈을 두었다.
어렵게 꺼내두었을 마음이 엄마에게 닿지를 못하고
저녁을 다 먹은 후에도 엄마의 짜증이 그치지를 않자 아이는 방법을 바꿨다.
"엄마- 우리는 가족이자나."
"행복한 가족이자나 우리느은-"
두 마디의 말을 한 뒤 아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엄마를 올려다본다.
"제발, 화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엄마랑 웃으면서 놀고 싶어요."
그 소 눈알 같은 눈 두 개가 못다 한 말을 잇는다.
아직 만 3살이 채 되지 않은 저 아이에게
어쩌다 나는 눈으로 말하는 법을 가르쳤을까.
아직 아이가 없었을 적에
내 아이는 일찍 철들지 않고 그저 오래도록 해맑았으면 했던 맘과는 다르게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아이가 되었다.
어떤 날엔 그게 편하기까지 했다.
만 3세까지의 부모님과 갖는 관계의 모양이
후에 성인이 되어 갖는 인간관계의 토대가 된다는데
'어떻게 해도 넌 사랑받는 존재야.'라는 메세지 대신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라는 메세지를 남기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최고의 것을 찾았고
그렇게 행복이란 단어를 찾게 해 준 아이에게 언제나 행복을 보여주진 못했다.
어쩌면
죽겠도록 예뻤다가 죽겠도록 미웠다가 하는 자식과도 같이
부모도 미치도록 좋았다가 싫었다가 할 수도 있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싫고 무서운 순간보다는 네 편이 되어주는 순간이 많아지기를.
네게 그런 어른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엄마도 자라 본다.
네가 애처롭게 아프며 자라나는 것처럼
엄마도 자라 보려 애를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