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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오늘 진짜 왜 그래

만 3세의 서러움

by 풍또집

퇴근을 했다.

피로가 잔뜩 쌓인 날이었다.



그날따라 아이들은 하원길부터 말을 듣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하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도무지 엄마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몇 차례 큰 언성이 오가고 나서야

비로소 다 같이 침대에 누웠다.



이미 평소보다 1시간이나 늦어진 취침 시간.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루쯤 늦게 잘 수도 있는 법이건만

이 날 엄마의 마음은 불이 들어앉아 여유를 가질 공간이 없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둘째 아이가 물을 달란다.



그까짓 물 떠서 먹이는 데 1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19개월 아기에게 알아듣든지 말든지 잔소리를 퍼붓는다.



꼭 침대에 올라기만 하면 물을 찾는 둘째 아이기에 방에 들어오기 전 물을 줬다.

하지만 아이는 거부하며 물 잔을 밀어냈었다.



안 먹겠다는 걸 억지로 먹일 수는 없으니,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러 들어간 참인데

아니나 다를까 눕자마자 물을 찾는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탓에 텅 빈 듯했던 침실에 둘째의 서러운 울음소리만 꽉 찬다.



사실은 엄마도 이런 눈물바다는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안다.

교훈 같은 건 고사하고 되려 자는 시간을 더 늦출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다시 한번 푹. 숨을 깊게 내쉰다.



내쉰 숨을 밟고 정수기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 첫째 아이가 말을 보탠다.

"엄마 나도 물."



첫째 아이는 아직 아침에 종종 실례를 한다.

해서 자기 전 꼭 화장실에 들르게 하는데

이 날은 하필 소변이 마렵지 않다며 변기에 앉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방으로 그냥 들어온 날이었다.



화장실에도 못 갔는데 물을 마시고 자면 아침에 이불 빨래가 늘을 것 같았다.

화가 나면 안 될 곳으로 곧장 화가 향한다.



"그럼 너 혼자 쉬 싸고 손 닦고, 니가 물 떠서 마셔."

"..."



"왜애~ 엄마가 해죠. 나 무서우단 마리야."



혼자 볼일을 잘 보는 아이지만

자기 전에는 꼭 같이 화장실에 가자며 떼를 쓴다.

평소에는 져주는 편이건만 오늘은 엄마가 이미 한계였다.



"아니. 니가 해. 니가 할 일이잖아."

"..."

"으아앙!!!"



아이는 한 차례 더 침묵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동생도 물을 달라했는데 본인의 물은 셀프라니 서러울 만도 하다.



"엄마 왜그래애!!!"

여기까지는 많이 겪어본 상황이었다.



"오늘 지짜 왜그래!!! 나하테 오늘 지짜 왜그러는데에!!!"

이 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이다.



나는 삽시간에 어떤 감정에 휩싸였고

튀어나가듯 아이에게 달려가 그 작은 걸 꼭 안았다.

엄마가 안아주니 아이는 더 서러운 울음을 토해낸다.



겨우 3년을 조금 넘겨 살아낸 이 아이가

얼마나 오늘 하루가 서러웠으면 '오늘 대체 왜 이러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가.



내 하루의 무게가 아이에게 옮겨간 것 같아 미안했고

품에 안겨 계속해서 항의하는 아이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지쨔 왜그래! 왜그러냐고!!"



아이도 비로소 웃음을 보이는 엄마를 보더니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내뱉는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오늘 피곤해서 그랬어. 엄마가 그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

"엄마 나하테 얼룬 사과해!"

"응, 미안해 우리 아가."



"갠차나- 나도 화내서 미안해-"

요즘 엄마가 사과만 하면 뒤끝 없이 용서해 주는 아들이다.



.

.

.



요즘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큰다.

원체 또래에 비해 어휘력이 좋은 편이기도 하지만

정말 요즘은 어른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이런 표현들을 쓰고

존댓말을 꼬박 쓰는 걸 보면서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내 아이가 그릇 작은 엄마 밑에서

눈치를 보며 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오늘 진짜 나한테 왜 그래."라는 말은

내가 아이에게 한 적이 있는 말이었다.



정말 서러운 날이었고, 아이에게 원망을 내비쳤다. 내가.



그 말을 아이가 그대로 옮겨 썼다.

아이가 나를 닮게 크는 것만 같았다.

썩 유쾌하진 않은 일이다.



어릴 적 나의 엄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힘든 삶을 살았고

당연히 항상 날이 서있었다.



오빠와 나는 엄마 눈치를 보았고

엄마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면아이라고 하던가.

지금 아이를 기르면서 그 어릴 적 눈치 보던 아이가 자꾸만 튀어나온다.



아이로서 미숙한 감정을 이해받지 못하고 삼켰던 어린 날들이

지금 와서 미숙하게 터질 때가 참 많다.

그때 눈치 보던 것이 습관으로 남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참으로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을 적 엄마의 모습과 내가 참 많이 닮았다.



내가 "미안해."라는 말 하나로

아이에게 진 얼룩을 지울 수 있을 때,

이 시기가 지나기 전에,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아이 마음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엄마는 성숙하려 매일 노력한다.

아이만은 온전한 어른으로 키워주고 싶어 계속해서 노력해 본다.



엄마가 어서 큰 나무로 자라서

너를 안전히 지켜줄 수 있기를.

사랑해, 우리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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