뫄뫄만 빼면 좋은 사람이라니까!

너를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

by 유경

나는 술을 마실줄 모른다.

과학실에서 맡던 알코올 향이 가득한 소주를 왜 마시는지 모르겠고

맥주도 첫 모금만 시원할 뿐이며 술을 마시면 어지럽고 졸리고 멍한 기분이 싫다.

다음 날 늦도록 술이 안 깨는 체질은 덤이다.


전남편은 술을 정말 좋아한다.


주사가 거의 없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장점이었다.

술은 마시지만 있는 주사라고는 잠을 자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꼬박꼬박 집에도 들어왔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술을 좋아할 뿐이었다.


술. 만. 빼. 면.


나랑 잘 맞는 사람이었다.

TV예능프로를 보며 같은 포인트에서 웃었고 책을 읽는 취향도 비슷했으며 정치적 종교적 성향도 거의 비슷했다. 주말이면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는 일도 좋았다.


게다가, 한참 일을 열심히 하고 사업을 준비할 때는 접대로 인해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꼭 6시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실천했다.


정말 술. 만. 빼. 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하고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그는 거의 종일 술을 마셨다.

아침에도 마시고 점심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셨다.

우리 아이들은 항상 아빠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봤다. 술 없이는 밥을 안 먹었으니까.

(아직도 아이들은 소주잔을 보면 발작을 한다.)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대도시에서 지방소도시로 이주를 결심했다.

이주한 곳은 관광지여서 여행하듯 살았는데, 그때도 남편은 술을 마셨다.

아침에도 마시고 점심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셨다.


그리고 그 술로 인해 우리의 관계는 망가졌고 그는 더 이상 미라클 모닝 따위를 하지 않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술을 좋아하는 그에게 사업을 하려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져야 한다고 유럽패키지를 권하면 안 되었고

학력이 낮으면 불리하다고 대학원을 권하면 안 되었다.

뒷바라지를 자처하고 그가 가진 단 하나 "술을 좋아하는" 것을 눈 감지 말았어야 한다고.

내가 이렇게 노력을 하면 그가 바뀔 줄 알았다.

아이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는데도 그는 바보온달이 아니었고,
나는 평강공주가 아니었음이 더욱 명확히 드러날 뿐.




직장에서 10살 어린 직원이 결혼을 앞두고 회식자리에서 하소연을 한다.


- 과장님, 정말 제 와이프는 꿈꾸던 사람이에요. 외모는 제가 꿈꿔왔던 이상형이거든요.

정말 미치도록 사랑해요. 집안도 저보다 잘살아요. 그런데, 무언가에 꽂히면 잠을 안 재워요.

자신의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저를 추궁해요. 이 친구 만나고부터 8시 이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저 오늘도 회식한다고 하는데 가지 말라고 거기 여자 있는 거 아니냐고 닦달을 해서 전화기 꺼놨어요.

그것만 빼면 정말 괜찮은 친구인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전의 나라면 이러한 조언을 했을 테다.

"네가 잘 맞춰주면 나아질 거야. 의심이 드는 행동을 해서 걸린 적 있는 거야?

의심 들지 않게 조심하면 되지~ 지금도 얼른 나가서 전화하고 빌고 와!! 결혼하면 다 맞춰서 살 수 있어."


지금의 나는 단시간에 소주 3병을 마셔버려 인사불성이 된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노력한다고 해서 네버, 절대, 결코, 상대를 바꿀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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