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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펭귄 Oct 30. 2022

똑바로 선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 펀치 드렁크 러브

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소현: 현우야, ‘펀치 드렁크 러브’ 봤어?

현우: 네, 봤어요.

소현: 어땠어?

현우: 아름다운 영화 같아요.

소현: 어떤 점이?

현우: 주인공 베리가 사랑을 위해서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서라도 하와이로 레나를 찾아가서 만나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 같아요.

소현: 그럼 이제 사랑이 뭐 같은지 얘기할 수 있겠어?

현우: 음… 뭐라고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 거 같긴 해요. 우선 서로 솔직해져야 하는 것 같아요.

소현: 솔직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

현우: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봐야 하는 거 같아요. 그리고 타인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 행동마저 존중해줘야 돼요.

소현: 그리고 그 존중은, 나 자신을 먼저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지. 무조건적인 타인 존중은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잖아. 나를 해치는 거니까. 내가 먼저 온전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현우: 네. 나 자신을 먼저 챙겨야 타인과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는 거죠.

소현: 맞아. 베리가 점점 자신을 찾아가면서 비로소 레나와 솔직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네가 하와이로 레나를 만나러 가는 장면을 아름답게 본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 베리가 처음으로 솔직해지고 감정을 표출한 걸 극적으로 표현한 장면이었으니까.

현우: 네. 펀치 드렁크가 복싱 선수들이 머리를 맞고 멍한 상태가 되는 걸 뜻하는 거잖아요.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펀치 드렁크 상태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베리 또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해서 계속해서 멍한 상태였던 거죠. 그러다 하와이행을 결정하고 멍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소현: 맞아. 아마 베리는 유년의 베리가 솔직하게 감정을 표출했던 일이 일곱 누나와 여동생의 놀림거리로 전락한 뒤부터 솔직해지는 걸 두려워하게 된 거 같아. 그래서 계속 펀치 드렁크의 상태였던 거지.

현우: 그러면 이 영화에서 솔직해진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과 같은 사실을 알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똑바로 보게 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소현: 그렇죠. 베리가 초반에 ‘모른다’, ‘모르겠다’는 대사를 정말 많이 해. 생각이나 감정이 어떤지 묻는데도 말이야. 그러다 레나에게 거짓말도 하는데, 결국에는 진실을 말하게 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비로소 사랑을 하게 되는 거지.

현우: 한 명이라도 솔직해지지 않으면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영화 속 베리처럼 계속해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다 보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베리가 사랑을 이루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다 보여줬기 때문이에요.

소현: 그렇게 보면, 레나는 이미 먼저 서 있던 사람이지. 왜냐하면 베리한테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줬으니까. 사실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표현을 서슴없이 하잖아. 베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도 솔직하게 오픈하고. 그러니까, 똑바로 선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여줄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겠지.

현우: 네, 그렇게 똑바로 선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인 거죠.

소현: 이야, 많이 컸네, 현우.

현우: 제 키가 175cm는 넘죠.

소현: 너 신체검사 결과 내가 다 아는데? 신발 신고 말하는 거지?

현우: 넘어가시죠.

소현: 그래. 너도 펀치 드렁크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있어?

현우: 그 펀치 드렁크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멍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소현: 응.

현우: 있죠, 저도.

소현: 뭔데, 말해줘 봐.

현우: 아, 제 인생 스토리 비싼데.

소현: 들어주는 게 더 비쌀 듯.

현우: 예, 예.

소현: 말해봐~!

현우: 저는 천재였습니다.

소현: 뭐에서?

현우: 모든 면에서요.

소현: 내 말 맞지?

현우: 네?

소현: 들어주는 게 더 비싼 거 맞잖아. 그래서?

현우: 이게 어디서부터 시작이냐면요, 제가 어렸을 때 미술에 소질이 있었어요.

소현: 오, 그건 처음 듣는 얘기네.

현우: 저도 제 자신이 소질이 있는 걸 알았고, 자연스럽게 중학교 때부터 진로를 미술 쪽으로 가기 시작했어요. 이게 저의 첫 번째 펀치 드렁크였어요.

소현: 왜? 알고 보니 소질이 있던 게 아니었어?

현우: 아니요. 소질은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미술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소현: 아…!

현우: 입시 미술학원까지 다녔는데, 다른 애들은 미술을 좋아해서 항상 열정이 넘치더라고요. 근데 저는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미술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소질이 있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에는 미술을 그만두고 다른 애들처럼 공부를 했죠.

소현: 그게 언제죠? 고1 때 평균 20점대였잖아요.

현우: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소현: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미술 그만두고 성적이 어땠는데?

현우: 공부 조금 해보니까 하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운동을 시작했죠. 그게 저의 두 번째 펀치 드렁크입니다.

소현: 맞아, 운동했다는 건 알고 있지. 학부모 상담 때 현우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어. 그건 왜 펀치 드렁크였어?

현우: 제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하나의 도피처였죠.

소현: 음… 결국 공부를 하기 싫어서 운동을 했는데 그 운동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던 거네.

현우: 네, 그래서 운동도 얼마 못 가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소현: 그러면 펀치 드렁크를 벗어난 계기가 뭐야?

현우: 아무리 열심히 해도,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재밌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현: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본 경험이네. 그래서 지금은 재밌어?

현우: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영화가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한다는 게 미술이나 운동이랑 확연히 다른 점이죠. 영화는 재밌거든요.

소현: 나도 너한테서 가장 대견한 점이야.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던 네가 평균 20점대에서 올백을 맞다니!!! 평생에 걸쳐 얘기해도 될 자랑스런 사건이지.

현우: 힘들었던 시기죠.

소현: 그래도 그 시기들을 지나서 너 자신을 똑바로 보고 너를 가둔 것들에서 탈출한 거라고 할 수 있지.

현우: 그러면 영화도 현실도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을 가둬두는 수많은 문을 지나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해야겠네요.

소현: …갑자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부작용이 있네, 있어.

현우: 좋은 거죠?

소현: 글쎄….

현우: 농담이고요, 베리가 레나한테 키스를 하러 달려가는 장면에서 수많은 출구를 지나가잖아요. 그게 마치 이전의 베리에서 벗어나는 거 같아서 말해 봤어요.

소현: 잘 캐치했네. 이제 더 이상 사랑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겠다.

현우: 네. 이제 완벽히 알 거 같아요.

소현: 오~ 뭔데?

현우: 똑바로 선 두 사람이 서로의 박자가 아닌 또 다른 박자에 맞춰서 함께 춤을 추는 게 사랑이에요.

소현: 그게 무슨 말이야?

현우: 사랑을 춤추는 과정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말이에요.

소현: 흥미로운 접근이네.

현우: ‘월플라워’와 ‘그녀’에서처럼 주고받는 모습이 사랑인데, 그게 가능하려면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면 안 돼요.

소현: 음… 혼자 춤추는 게 아니니까 주고받는 거고, 그 무대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면 안 되지.

현우: 그쵸. 그리고 ‘라라랜드’처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닌, 헤어지더라도 상대의 꿈을 사랑해줄 수 있어야 되고, 그러려면‘더 랍스터’처럼 상대방의 박자에 맞춰주는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박자를 찾아가야 되잖아요.

소현: 그치, 성숙한 사랑, 완성도 높은 두 사람의 춤은 그렇겠지.

현우: 네. 그럼, ‘펀치 드렁크 러브’처럼 자기 자신의 박자를 찾아가면서 동시에 상대의 박자에 맞출 수 있게 되고, 서로 존중하면서 그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박자가 되는 거예요. 그 박자에서 춤을 추는 게 진정한 사랑이에요.

소현: 완벽하네. 이론을 아는 만큼 실천이 되면 좋으련만. 너 기억나니? 네가 나한테 처음 연애 상담했을 때, 내가 이론 박사라고 했잖아.

현우: 네……. 이제 저도 이론만 박사가 되겠네요.

소현: 그게 나의 빅픽처였지. 성숙한 사랑이 뭔지 알수록 더 어려워지는 법.

현우: 아, 그럼 저도 이제 쌤처럼 연애 못하는 거예요?

소현: 그게 내 큰 그림이었다니까? 나만 못할 순 없지.

현우: 와… 제가 보여드릴게요, 이론 박사도 성공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걸!

소현: 그래, 나도 너의 사랑을 응원해.

현우: 쌤도 아직 안 늦었어요. 힘내세요.

소현: 고오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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