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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Jul 07. 2024

편지를 쓰기 전 손을 씻습니다

형태에 마음을 담는 일

저는 편지를 쓸 때마다 꼭 하는 루틴이 있습니다. 먼저 손을 깨끗이 씻어 향기롭게 하는 일입니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는 동안 천천히 상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책상 앞으로 와 한층 산뜻해진 손으로 편지지를 가지런히 두고 펜을 잡습니다. 향기로움을 더하고 싶을 땐 핸드크림을 발라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잠시 더 기다립니다. 이렇게 하게 된 계기는 어느 한 영화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영화 <연애소설>의 첫 장면


영화 <연애소설(2002)>에서 여자주인공은 편지를 쓰기 전 세면대에서 늘 비누로 손을 씻습니다. 두 손을 꼭 새의 날개처럼 가지런히 모으고 손바닥 안에서 둥근 비누를 천천히 굴려 부드럽고 천천히 손을 씻습니다. 그리고 편지봉투를 가지런히 접고 직접 찍은 사진을 넣어 풀로 봉합니다. 그 편지를 받은 남자주인공은 코를 킁킁거리며 편지에서 기분 좋은 비누향이 난다고 기뻐합니다.


“왜? 무슨 냄새 나?”

“응. 비누 냄새.”


’편지에 향기를 실어 보낼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후 저도 편지를 쓰기 전에는 꼭 손을 씻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수건으로 손을 닦을 때도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닦습니다. (영화 안에서 또 다른 여자주인공은 편지를 쓰기 전 작은 손수건으로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닦곤 하거든요) 이런 동작을 하나하나 치르고 나면 어수선했던 마음이 어느새 서서히 가라앉아, 편지를 쓰기 딱 좋을 정도로 차분하고 깨끗한 마음가짐이 됩니다. 전보다 깨끗해진 손에 닿는 편지지의 감촉도, 펜을 쥔 손가락의 느낌도 한층 상쾌해져 기분 좋은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갓 구운 빵, 갓 내린 차 같은 향기롭고 신선한 마음을 선두로, 좀 더 마음 위에 맑게 떠오른 말들을 적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형태에 마음을 담는 거란다.“


다도를 다룬 좋아하는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다도를 배우는 수강생 노리코는 차 한 잔을 우리는데 이렇게나 복잡한 절차와 공식을 따라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품습니다. 그래봤자 형식적인 것 아니냐면서요. 그러한 마음을 읽은 다케타 선생님은 먼저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마음을 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화 <일일시호일> 중에서


편지 한 통을 쓰기 전 나름의 의식으로 손을 씻고 향을 더하는 일도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생략하고도 마음대로 차를 우릴 수 있듯이, 손을 씻지 않고도 편하게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형식을 만들고 하나하나 행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그에 맞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일일시호일> 중에서


다도를 할 땐 다완을 손에 쥐고, 찻물을 소리 없이 따르고, 손수건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정갈하게 접으며 ‘차를 마시는 마음’을 준비합니다. 편지를 쓸 땐 방금 전까지 먼지가 묻어 있던 손을 깨끗이 씻고 포근한 향기를 더하는 것으로 소중한 사람에 대한 예의와 사랑을 준비합니다. <연애소설> 속 주인공이 비누를 손 안에서 조심히 굴릴 땐 자신과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두 손을 모아 비누칠을 할 땐 흩어져 있던 감정들을 소중히 보듬는 것처럼 보이듯이요. (꾹 짜는 핸드워시가 아닌 부드럽게 굴려야 하는 비누, 그것도 각진 비누가 아닌 둥근 비누로 씻는 모습도 정말 디테일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꼭 편지 쓸 때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반복하는 많은 일도 이러한 루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기본>을 쓸 때면 마찬가지로 손을 깨끗이 씻고 따뜻한 차를 우립니다. 두 다리를 정직하게 땅에 붙이고 바른 자세로 쓰고, 아침에 쓸 때면 세수도 꼭 합니다. 글을 쓸 때의 기분 좋은 마음가짐을 갖추기 위한 소소한 의식들입니다. 글을 읽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지만, 편지에도 향기가 담기듯 글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담겨 분명히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요?


편지에 담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글에 담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차 한 잔에 담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를 만들고 어떤 마음을 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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