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감각하는 방법
책상에 새로운 친구가 생겼습니다. 처음 가져 보는 탁상시계입니다. 정직한 눈금과 단순한 숫자, 밝은 나무 몸통에서 따스함이 느껴지는 시계입니다. 갑자기 ’아, 시계를 들여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시간을 정확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정확한 시간이라는 것은 57분, 12분, 39분과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시간이란 휴대폰 터치 한 번이면 정확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편리함 속에서도 제 안에서 은은하게 남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휴대폰을 지니게 된 후로부터 우리에겐 추상적으로 시간을 감각하는 방법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고요.
옛날 사람들은 해의 움직임이나 각도, 빛깔 등에 의지해 시간을 읽었습니다. 대략 정오쯤이구나, 해가 서편으로 지는 걸 보니 곧 저녁이 다가오는구나, 어슴프레 여명이 밝아오는 걸 보니 곧 아침이겠구나, 하고요. 그들이 파악했던 것은 대략 아침, 낮, 저녁, 새벽 정도였습니다. 그 후 시계가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지금이 3시구나, 11시 반이구나 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리고 누구나 휴대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지금, 우리는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각은, 2시 44분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니다. 일상 속에서 아주 정확한 시간을 읽어야 하는 일은 얼마나 될까요? 지각하면 안 되는 중요한 미팅, 회의 시간, 좋아하는 공연의 티켓팅, 버스나 기차 시간, 예매한 영화의 시간 같은 것이려나요. 그 외에 특수한 직종에 있지 않고서는 대부분의 경우 ‘대략 -시쯤’, ‘30분 정도’ 정도의 뉘앙스만 파악해도 충분한 일들 뿐입니다. 그런 순간에조차 1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에 노출되는 것이 언젠가부터 은근히 피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떠올렸습니다. “때로는 아날로그 시계를 쓰자.“
시간이란 것을 너무 뾰족하게 감각하고 싶지 않을 때, 아날로그 시계는 도움이 됩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자리를 대충 읽으면 그만입니다. ‘2시 55분쯤인가’, ‘곧 3시 40분이 되네.’하며 뭐랄까 조금 더 여유로운 기분이 된답니다. 너무 정확한 시간을 읽어버릇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1분, 2분 지나는 것에 수시로 마음 졸이며 경직되어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날로그 시계의 또 다른 이점은 오롯이 시간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켜면 아무래도 시간만 읽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것저것 눌러보다 정신을 차리면 SNS나 재미있는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탁상에 놓인 시계나 손목에 두른 시계를 통해서는 깔끔하게 시간만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읽을 땐, 오롯이 시간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단순한 통로 한 가지로 물건과 나의 일상이 담백하게 연결됩니다. 무엇보다 시계가 있는 풍경이란, 가만히 생각하니 꽤 아름답지 않은가요?
집 안의 풍경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일상 속 모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계에 자명종 기능이 있어 아침 7시 30분‘쯤’에 맞춰 두었더니 ‘짜르르릉’ 울려 저를 깨웁니다. 손을 더듬어 버튼을 눌러 소리를 끕니다. 휴대폰 알람이 울릴 땐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보게 되는데,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만지지 않아도 되어 기분이 상쾌합니다. 또 예의를 갖추고 임하는 미팅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리는 모습보다 손목시계를 조용히 내려다보는 동작은 보기에도 깔끔하고 조금 더 아름답습니다.
집에 둘 용도로 디지털 시계도 많이들 선택하는 듯 하지만, 역시 저는 아날로그 시계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대략적인 시간을 읽는다’는 관점에서 디지털 시계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픽셀로 표현된 숫자가 아니라 나의 눈으로 직접 시간의 자리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아닌 ‘시간의 자리’를 바라봅니다. 시간을 읽지 않고, 가늠합니다. 시곗바늘이 가리킨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싶습니다. 57분인가, 58분인가? 눈을 찡그려가며 읽는 대신 산뜻한 느낌으로 ‘곧 6시가 되는구나’ 매듭짓고 홀가분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노단위로 켜켜이 쪼개진 바쁜 생활에서 너무 정확한 것, 과하게 또렷한 것보다 때로는 대략적인 것 즉, ‘쯤’이라든가 ‘곧’이라는 감각이 우리에게 여백과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