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도시
파리는 지저분한 도시다.
공용 화장실을 사용할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고,
도시 곳곳에서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베른을 떠나는 날 사건이 터졌다. 모든 사건은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온다. 언제를 기차를 탈 수 있는 패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차표가 매진되면 패스를 가지고 있어도 탈 수가 없다. 12월 27일은 유럽의 극성수기로, 모든 사람들이 대도시나 휴양지로 이동하기 위해 대부분의 기차가 매진된다. 이때까지 큰 어려움 없이 기차를 탔기 때문에 방심했다.
아침에 눈을 떠 기차 시간을 어플을 통해 확인하자마자 충격에 빠졌다. 오후까지 고속열차가 모조리 매진되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베른 중앙역에 갔더니,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에 가까운 기차들을 여러 번 타야 파리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직원이 뽑아준 스케줄 표 위로 빨라야 오전에 출발해 밤늦게 도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며 우울해졌다.
프랑스 국경을 넘으며 또 사건이 터졌다. 몇 번 환승을 하며 기차를 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탄 것 같았다. 역무원도 안 보이고, 탑승객도 없어서 막막했다. 인터넷도 안 돼서 지금쯤 어디 내려야 하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기도 어려웠다. 버스에서나 볼 법한 글씨만 나오는 전광판에 원하던 목적지가 보이긴 해서 여긴가 하는 마음으로 내려버렸다. 기차가 떠나고 나서야 잘못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기차는 3시간 뒤에 오는 것이었고, 그 기차를 타서 목적지에 간다 한들 우리나라 KTX의 엄마 격인 TGV의 자리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니 짐이 잔뜩 쌓였는데, 그 무거운 짐들을 끌고 무작정 걸었다. 3시간 동안 역에 있을 수는 없으니, 펍이나 카페라도 들어가 충전도 하고 주린 배도 채워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었고, 심지어 지나가는 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한 공동묘지 앞에서 고인에게 인사를 하러 오던 중년의 부부와 만났다.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시골에 짐을 잔뜩 끌고 온 동양인에게 당연히 관심이 갔나 보다.
나에게 불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당시에 내가 외국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영어뿐이었다. 인터넷도 안 터져서 번역도 못하고 몸짓으로 파리를 가야 한다고 말을 했는데, 중년의 넓은 이해심으로 근처 도시인 콜마르로 가는 콜택시를 불러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갖고 있던 귤 2개를 선물하고 콜마르에 무사히 도착했다. 콜마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되는 마을의 모티브가 되는 곳이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이렇게 예쁜 도시를 즐기지 못했기에 꼭 다시 돌아와 부부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힘겹게 콜마르에서 TGV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다.
숙소는 한인민박이었다. 연말이어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있고 싶었는데,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것은 파리의 마지막 날을 이야기 할 때 다루고 싶다. 파리 동쪽에는 퐁피두 센터라는 문화예술 공간이 있는데, 숙소는 이 근처였다. 루브르 박물관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려, 아침 일찍 일어나 루브르 박물관 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할 수 있었다. 아침 9시인데도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기도 해서 외관에서부터 볼거리가 넘쳤다.
루브르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오르셰 박물관은 고흐의 작품들을 보러 가고,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를 보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나리자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을 엄두가 안 날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아무리 약탈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용히 즐기고 싶었던 나는 불편함을 느끼며 박물관을 나섰다.
박물관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작은 개선문은 우리가 아는 큰 개선문과 신도시에 지어진 '라 데팡스'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옆으로 에펠탑이 머리를 보이고 있었다. 파리 곳곳에서 에펠탑이 보여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에펠탑과 처음 조우한 이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박물관을 나와 센강 위에 있는 많은 다리들 중 하나를 건너면 왼쪽으로는 최근에 불에 탔던 노트르담 대성당과 예술의 다리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알렉산더 다리와 에펠탑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오는 것은 폐역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오르셰 박물관이 나타난다. 루브르 박물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방문해보면 좋다. 5층 기념품 샵 앞에 포토존이 있으니 방문했을 때는 이곳도 꼭 들러봐야 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마레지구에 들러 파리의 패션 트렌드를 엿볼 수 있었다. 파리의 스트리트 패션이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고가의 명품처럼 포장된 경우가 있는데, 이 골목에 들어서면 '이 가게가 그 브랜드라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름해 보인다. 팔라펠이라는 유대인들이 먹던 채식 음식이 있다. 콩고기가 올라간 샌드위치 같은 건데, 먹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다시 루브르 박물관을 들러 박물관의 야경을 즐긴다. 힘들게 온 파리인만큼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