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송악산 둘레길 #산책 #힐링 #명상 #직장삼락
인간의 존재 목적은 생존이 아닌 삶이다.
난 더 오래 살려고 애쓰기보다는 주어진 시간을 뜻깊게 쓰리라.
<007 No time to die>에서 말로리(M) 국장이 죽은 제임스를 추모하며 읊조린 말이다. 어쩌면 찰나와 같이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저릿했다.
《나체와 함께 산책을》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 난 요즘 '생각을 하지 않기'위해 산책을 통한 명상법을 자주 실천하고 있다.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뇌는 더 활성화되는데 습득한 정보를 정리해 다시 새로운 활동을 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일,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온갖 걱정과 불안감, 감정 따위 등의 의식 자체를 비울 수 있다. 바쁜 업무로 지친 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은 어쩌면 산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랜만에 간 제주도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내서 들른 곳이 있었는데 바로 제주 최남단에 위치한 '핫플' 송악산(松岳山) 둘레길이었다. 바쁘고 분주한 직장생활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들를 수 있는 여유 또한 직장생활의 삼락(三樂) 중의 하나가 아닐까. 2015년도부터 정상부가 통제된 지 6년 만에 개방이 된 탓에 발길을 더 재촉하게 되었다.
전일 마신 술이 덜 깬 상태라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송악산은 한라산처럼 웅장하지만 않지만 완만한 해안가 둘레길은 나무 펜스와 바닥석으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둘레길에 들어서니 시원하게 트여있는 바다 전망과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보이는 정상의 분화구와 해안가를 따라서 보이는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독특한 암석층으로 이루어진 해안 절벽의 웅장함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가을의 송악산은 은빛 물결이 넘실대는 억새의 향연이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고, 숨이 막힐 정도의 풍광을 만들어내면서 오름을 걷는 내내 보는 이들에게 감동과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송악산 둘레길은 총길이가 약 2km 남짓 되는데 성인 보통 걸음으로 1시간이면 충분하게 전 코스를 느긋하게 감상하면서 절경까지 즐길 수 있어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는 좋은 코스였다. 가는 길의 산 중턱에는 방목한 말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노닐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상에 오르면 최남단 섬인 마라도와 가파도, 독특한 모양의 형제섬, 우뚝 솟은 신방산, 용머리 해안, 모슬봉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바닷가 해안 절벽에는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동원해 갱도 진지를 구축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어 전쟁, 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코스로도 이용되고 있어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다만 일제 때 뚫어놓은 진지동굴이 최근 해안의 응회암층이 풍화, 침식 작용으로 붕괴하면서 동굴이 파묻혀 아쉬움이 크지만 송악산 절벽 일대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을 만큼 층층이 쌓인 독특한 화산 지층은 오랜 기간 파도에 쏠려 깎이고 다듬어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해안 층층 절벽의 움장함과 아름다움은 심쿵할 정도로 멋졌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송악산 남쪽으로 1.8km 떨어져 있는 무인도인 형제섬은 길고 큰 섬이 본섬, 작은 섬을 옷섬이라고 부르는데 본섬에는 작은 모래사장이 있고, 옷섬에는 주상절리층이 일품이라고 하는데 육안으로 보기가 어려워 아쉬움이 더욱 컸다. 일출과 일몰 시에 더 장관이라고 하니 방문하실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둘레길의 마지막 구간은 솔잎이 낙엽이 되어 뒤덮여 솔향이 가득한 오솔길이었다. 정말 마음이 가벼워지고, 비워지면서 발걸음 또한 한결 가벼워졌다. 송악산 둘레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오감을 만족시키는 보물과도 같은 행복 가득한 길이었다.
송악산 둘레길 산책을 통해 분비된 세로토닌이 내 몸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해안의 절벽, 청명한 가을 하늘과 파도소리, 바람소리, 억새들끼리 부대끼며 재잘거리는 자연의 소리는 산책을 하는 동안 내 몸은 자연과의 공명이 일어났고, 난 온전하게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몰입할 수 있었다.
니체는 '산책은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여행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가 자연에서 찾아낸 것은 '광대함, 고요함, 햇빛'이었다고 한다. 나 또한 송악산 둘레길 산책을 통해 니체가 찾은 세 가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송악산 둘레길 산책은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기고, 잡념이 없는 상태에서 나와 오롯이 만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요즘은 짬이 날 때마다 산책을 한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지친 나를 보듬기 위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산책이기 때문이다. 삶의 불필요한 잡념과 걱정,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자주 생긴다면 산책을 적극 추천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면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가까운 공원이나 수목원처럼 자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걷다 보면 어느덧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편견 없이, 마치 놀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너무 복잡하게 현재의 삶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산책을 통해 생각을 비우면 생각의 각도와 관점이 바뀌고, 그러면 암울하게만 느껴지던 세상도 여전히 살만하고, 노력하면 희망도 가질 수 있다는 얄궂은(?) 믿음도 갑자기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