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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Oct 07. 2021

(YJ)승진을 포기한 그대에게

#승진 #퇴직 #죽음 #워라벨 #가치관

<아무튼 출근>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잠시 시선을 뺏겼다. 대기업 카드회사 모대리의 PC 모니터 하단에 이렇게 쓰여있는 문구를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짤리고, 회사는 망하고, 사람은 죽는다.' 직설적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임은 틀림이 없다. 흥미 있게 본 내용 중 하나는 맞벌이 가정이었는데 주인공 남성이 승진 포기도 감수한 채 삼 년간 육아 휴직을 내고, 딸아이를 돌봤다는 점이다. 아이 돌보는 것이 승진보다 더 중요했단다. 기막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용기와 배짱이 왠지 멋있게 보였다.


승진은 꼭 해야 하는가? 나 같은 기득권자들이 이 말을 하면 욕을 먹는 질문이다. 결혼을 한 사람들이 미혼 후배들에게 결혼을 하지 말라는 진심 어린 충고와도 같기 때문이다. '지는 했는데 왜 하지 말라는 건지.' 물론 직장생활에서 승진은 결혼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승진을 하면 직장 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직책도, 급여도, 대우도 달라진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역할도 커진다.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 그 길에는 사실 금단의 열매가 달려 있고, 그 열매를 따 먹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승진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급여의 달콤함은 순삭 되는 것에 비해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지속되기 때문에 승진이 향후 펼쳐질 직장생활에 있어 축배냐 독배냐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터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한정된 인적 자원이 있는 계층 구조에서 직원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승진을 하고, 그들은 남은 경력 동안 준비되지 않은 직책을 맡으면서 조직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준비되지 않은 승진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고, 그 직책에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 그리고 업무적 챌린지를 해결할만한 충분한 자질이 결여됨으로써 승진한 개인에게는 업무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조직 측면에서는 끊임없는 불편, 낮은 생산성, 높은 수준의 무능력함을 초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이어지고 만다.


피터의 법칙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조직의 '인 앤 아웃(In & Out)'이 없다 보면 한정된 자원에서 관리자의 역할을 맡길 수밖에는 없게 된다. 승진만 하면 누구나 그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기존의 업무와 달리 업무의 복잡도와 폭이 넓어지고, 업무 분석과 의사결정의 순간들이 잦아지면 정신적 멘붕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실전이라고 말이다. 


이상하게 선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다들 어렵지 않게 그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해낸 것 같은데 막상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희생과 노력을 하게 된다. 결국 모든 해답은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깨닫는다. 


직장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여정들이 마찬가지다. 12년 이상의 학교 생활, 군생활, 결혼, 출산, 육아, 교육, 집 장만 등 인생에는 어느 하나 쉬운 여정들이 없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라는 말로 설명을 하고 있다. 누구나 다 겪고 경험하는 일들이지만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그것은 말 못 할 고통이 되는 것이다.


결혼 전까지는 집안 일도 전혀 하지 않았던 내 아내는 결혼 후 난생처음 하는 집안일 때문에 장모님을 부르며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출산, 육아 등을 하면서도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다들 하는 과정인데도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여정이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 하나 쉽게 느껴지는 게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직장생활에 정답은 없다


얼마 전 정년퇴직을 2년 앞둔 남성 직원의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직원은 현재 자신이 맡고 있는 중간 간부 직책을 후배에게 과감히 양보하고, 자신은 그 후배 밑으로 들어가서 이전과 같이 책임감 있고 신의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후배를 위해 자리를 양보한 것도, 그 밑에서 그 전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보면서 늘 쫓기듯 타인과 경쟁하면서 앞서기 위해 몸부림치고,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워라벨을 포기하면서까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야만 했던 지난 나의 과거와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면서 살고 있는 나의 현재 모습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일찍 승진을 하는 대가로 난 내 삶의 많은 소중한 시간들을 회사에 바쳐야만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면서 달려온 내 삶이 과연 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선입선출의 법칙! 빨리 승진하면 빨리 나간다!


내가 아는 선배 한분은 일찍 점장, 본부장을 달면서 주위의 부러움을 한껏 받아왔다. 빠른 의사결정과 판단력, 업무 추진력 등은 탁월할 정도로 뛰어났고, 자신의 그런 성격에 맞는 후배들을 척척 승진시키면서 인맥관리도 잘해나갔다. 생각하면 그때가 그 선배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너무 잘 나간 나머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상사에게는 늘 뻣뻣했고,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볼 때 그 선배는 늘 벼랑 끝에 있는 것처럼 위태해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그 선배 라인을 못 잡으면 승진이 안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선배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사 밑에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선배는 시간이 갈수록 상사와의 불협화음이 커졌고, 결국에는 자신의 화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발적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가 선배 나이 사십 대 후반이었다. 어떻게 보면 임원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한참 펼칠 나이 때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업무적 스트레스는 어떻게든 감내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는 참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퇴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상사와의 불화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진중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절이 싫으면 떠나면 되지만 주지스님이 싫으면 참고 견디는 게 현명하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직장생활은 가늘게 길게


반면 내가 부점장 시절에 모시던 점장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본사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오신 분이었다. 연세도 많았고, 유통과 다른 분야에서 오래 일하셨기 때문에 처음 경험하는 점장 생활은 그에겐 결코 녹녹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오히려 직장생활에서 불리할 수도 있지만 그분은 항상 나이가 적은 본부장에게 예의 바르게 깍듯이 대했고, 유통경험은 부족했지만 신의와 성실한 태도로 근무에 임하셨기 때문에 업무 능력에 비해 상사와 동료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너무 7시에 출근해서 12시 마감 때까지 근무하신 것이 큰 흠이긴 했다.


그분을 일찍 퇴근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술 한잔 하자고 꾀면서 밖으로 모시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매일 그분 때문에 눈치 보면서 퇴근도 못하던 부점장들도 그때만은 빨리 퇴근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그분은 마음의 빗장을 열었고 항상 후배들에게 "남들보다 늦게 가더라도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예의 바르고 신의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분의 직장 좌우명은 '가늘게 길게'였다. 


성과 만들기와 조직관리는 다소 서툴렀지만 평소 그분의 예의 바른 태도와 신의 성실한 태도 때문인지 결국 임원으로 승진해서 본사로 가셨고, 그분의 좌우명대로 정년퇴직에 준하는 나이에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퇴직을 하시게 되었다. 물론 퇴직 후에도 그분은 건설 관련 사업을 여전히 왕성하게 하고 계시고, 사업 또한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 성향은 맞진 않지만 그분은 욕심 많고 성격 급한 성향인 내게 있어 직장생활의 롤모델로 여전히 남아 있다. 



승진을 포기한 직장인들에게


회사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승진이 봇물 터지듯 넘쳐났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승진의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저성장 아니 역성장이 장기화되면서 관리자들의 급여가 동결되기 시작했고, 노사 이슈가 커지고 최저 임금의 가파른 상승이 겹치면서 하부조직의 급여는 꾸준히 상승해 계층 간 임금 체계가 역피라미드에서 하후상박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 심지어 점장과 부점장 간의 급여 역전현상도 적잖게 발생하게 되었고, 동업계와의 처우 경쟁력 또한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렇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는 점장이나 부점장과 같은 관리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직원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점장이란 직책은 누구나 달고 싶어 하는 그런 직책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어떻게 보면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못하는 직급이 바로 점장이나 부점장들이다. 한참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나이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급여는 올려주지도 않은 채 희생과 책임만을 강조하는 회사는 어떻게 보면 비열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현실이 계속되면서 관리자로 승진을 해서 업무적 스트레스나 희생을 강요받기보다는 워라벨을 즐기면서 비 직책자로서의 삶을 원하는 직원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물론 그중에는 나처럼 인정의 욕구와 사회적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한 후배들도 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관리자로서의 자질과 태도 또한 많이 바뀌었다. 희생과 신의성실의 덕목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 같은 역성장의 시기에 직장에서 롱런하기 위해서는 승진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피터의 법칙처럼 자신이 가진 업무적 능력과 책임감에 비해 과도한 업무와 책임감이 요구된다면 그것 또한 직장생활의 롱런을 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승진을 포기한 후배들을 탓하거나 욕할 수는 없다. 취업이 어렵고, 기대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시대에는 어쩌면 직장생활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오랫동안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씁쓸한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한번 사는 인생,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살고 현재 세상은 많은 것이 변했다. 직장관도 리더십도 많이 변했다. 승진을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마음을 비우고 오랫동안 다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무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욕심을 내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만은 절대 비우지 않았으면 한다. 


인생의 목표가 내가 계획을 하거나 욕심을 낸다고 해서 꼭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능력 있는 선배들도 하나둘씩 떠나게 되고, 누군가는 또 그 자리를 메워야 하기 때문에 굳이 욕심을 부린다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직책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수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된다. 사실 나 또한 뭐가 되고 싶다고 목표를 설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주어진 역할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다음 승진 기회는 저절로 따라왔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게 나의 승진 비결이기도 하다. 승진을 포기한 그대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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