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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Apr 14. 2022

탐라 한달살이를 시작하게 된 이유

#제주도 한달살기 #노병은 죽지 않는다 #쇼생크 탈출 #커피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퇴직 후에도 난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여전히 직장생활과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루틴을 만들어 삶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삶의 엄격한 규칙 속에서 4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월요일마다 되풀이되는 가슴 통증에도, 시도 때도 없이 휘몰아치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번아웃에도, 원치 않는 인간관계 때문에 생긴 대인 기피증에도, 존버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의 서글픔에도 난 어떻게든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돌덩이 같은 몸뚱이를 가까스로 추스른 채 출근이라는 삶의 무게를 꿋꿋이 버텨냈었다. 혹시나 몰라 항상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녔다. 그래야 언제든지 후배들을 위해 할 말 다하고, 아니다 싶으면 쪽팔리지 않게 출사표(?)를 던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한편으론 조금이라도 열정이 남아있을 때 최근 젊은 세대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퇴직 열풍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름 좋은 조건으로 희망퇴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용기를 내서 희망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됐다. 참 고생 많았다'라는 아내의 위로의 말에 호기롭게 퇴직을 신청했다. 오랜 기간 내 삶을 옥죄던 쇼생크 탈출을 일단 축하하고 싶었고, 새 출발을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다였다.


출처 : 맥스무비 2019-06-15 기사, "현실 공감 100%, '기생충' 참으로 시의적절한 명대사 3"


<기생충>에 나오는 송강호분이 말한 "무계획이 계획이야. 사람이 계획을 세우면 실패할 수 있지만 계획이 없으면 실패할 일도 없다. 그러니까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거야."라는 대사처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계획을 감행했던 것이다. 감았거나 엉클어진 실뭉치를 풀 때 실의 첫 부분을 찾으면 그 뒤부터 쉽게 풀어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뭔가 꾸준히 계속해서 하다 보면 남은 삶의 단서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난 퇴직 후 바쁜 직장생활 핑계로 차일피일 미뤘던 부동산 재테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우고, 루틴을 만들어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매학원을 아내와 함께 등록하고, 부동산 재테크에 관련된 서적도 구매해서 시험 보듯이 열공하고, 유튜브도 구독해서 꾸준하게 시청했다. 수시로 바뀌는 부동산 세제와 대출 규제로 부동산 투자 환경이 악화되고는 있지만 역발상과 청개구리 투자로 충분히 수익을 낼 만한 방법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20대는 인생에서 뭔가를 준비하는 시기고, 30대는 그 준비된 것을 실행하는 시기고, 40대는 실행된 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시기라고. 그러니 40대는 뭔가를 준비하고 실행하기엔 늦은 나이라서 공자께서도 40대는 세상 일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 나이 즉, '불혹(不惑)'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하물며 이런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50대)인 내가 뭔가를 뭔가를 준비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게 과연 맞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갑자기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다.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사는 게 피곤한 성격, 그런 내 삶에 뒤통수를 한방 날리기로 결심했다. 퇴직 후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스스로 옭아맨 모든 계획과 루틴을 중단시킬 특단의 조치로서 난 '제주도 한달살기(탐라 한달살이)'를 결정했다. 지친 심신을 달래줄 쉼의 특효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냥 멈추고 싶었고,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이렇게 맘만 먹으면 될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퇴직 후에도 스스로를 힘들게 갈구었는지 모르겠다. 


급한 성격과 빠른 실행력 덕분에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내와 함께 제주도 숙소와 배편 예약을 바로 완료했고, 경매학원 과정이 모두 끝나는 4월 초에 한달살기 짐을 차에 싣고 녹동항으로 이동해 페리호에 선적하면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일정이 마침내 도래했고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신혼여행 때 느꼈던 설렘과 기대감으로 녹동항을 향해 차를 몰았다. 가는 길에 섬진강 휴게소에 잠시 들렀는데 솜사탕처럼 만개한 벚꽃이 섬진강의 윤슬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우연히 들른 여행객을 발길을 붙잡는 바람에 한동안 우린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만난 반가운 봄손님


녹동항에 도착한 우리는 하룻밤 묵을 숙소를 예약해 체크인을 했고, 인근에 유명한 수산활어회센터를 방문해 평소 먹고 싶었던 갑오징어회를 포장해 와서 숙소에서 첫날 여독을 맥주와 함께 풀면서 앞으로 다가올 한달살이의 순조로운 여정을 기원했다. 익일 아침 일찍 우리는 녹동신항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해 차를 먼저 선적한 후 매표소에서 차량 선적 비용 결재와 더불어 예매한 표를 티켓팅할 수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 이후 출발 30분 전 페리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선택한 3등 객실은 선착순으로 좋은 벽면 자리를 잡아야 그나마 쉴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운 좋게도 우린 일찍 줄을 선 덕택에 그나마 벽면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운 바깥 날씨와 차가운 객실 바닥, 출입구가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린 자리를 포기하고, 식당칸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이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말만 페리호지 식당칸을 제외하고는 갈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식당칸도 손님들이 줄지어 이용하는 바람에 근근이 차지했던 자리마저도 비켜줘야만 했다. 그렇게 남은 두 시간을 선 채로 이동해야만 했다. 돌아올 때는 꼭 베개와 무릎담요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루하고 피곤했던 시간이 마침내 끝나고 우린 하선을 위해 차량이 선적된 곳으로 이동했고, 또 삼십 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다만 히터를 틀어 추운 몸을 녹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선이 시작되었고, 우린 예약된 숙소로 차를 몰았고 마침내 숙소에 도착했다.   


녹동항 숙소에서 먹었던 맛난 갑오징어 회 / 차량 선적 / 페리호 식당칸 


참고로 탐라 한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숙소는 '미스터 OO'이라는 앱을 활용해 선택했다. 사용 후기 만족도가 높고, 추천 리뷰가 많은 숙소를 선정했는데 막상 도착해 하루를 보낸 결과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합리적인 가격, 제주시 중심가에 위치해 주변 인프라와 대중교통과의 접근성 우수, 신축 오피스텔의 이점 등이 특히 맘에 들었다. 별도 욕실과 넓은 수납장이 한달살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평소 애용하던 딱딱한 모시베개를 가지고 갔는데 집처럼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간단하게 짐 정리를 마친 후 우리 부부는 삶의 연륜에 맞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인근 대형마트로 가서 필요한 먹거리를 사 와서 냉장고의 냉장칸과 냉동칸을 차곡차곡 채웠다. 아침에 먹을 간단한 샐러드와 과일, 여행 중 먹을 주전부리, 그리고 여행 후 숙소로 돌아와 당일 여독을 풀어줄 주류와 안주거리가 대부분이었다. 여행 중 당이 떨어지지 않도록 초코바도 챙겼다. 숙소에 커피잔이 없어 커피를 사면서 잔기획 세트를 구매했는데 참 맘에 들었다. 하지만 잔의 선택권은 아내에게 있는 줄 그 후에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골드 잔이 너무 맘에 들었는데..... 뺏겼다! 너무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매한 커피 기획세트 잔으로 커피 한잔. Black cup is wife's vs White is mine (depending on wife)


이제 한 달 동안 어떻게 보낼지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아내와 나는 여행을 하는 목적과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내는 관광형이고, 나는 휴식형이다.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육 년 전 결혼 이십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난 바쁜 회사 업무에도 불구하고 큰 맘을 먹고(회사 사표 낼 각오를 하고 ^^;)  4박 5일 간 아내와 함께 일본 오사카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아내가 사전에 치밀하게 짜 온 여행 스케줄대로 강행군하느라 4박 5일간 체력이 거의 방전이 되다시피 했고, 심지어 군대에서나 걸릴법한 발바닥 물집까지 생겨서 고생했던 아주 안 좋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여행에서만 유독 병약한 나와는 달리 아내는 오히려 활력이 넘치기까지 했다.  평소 집순이를 자처하고, 움직임까지 극도로 제한하는 아내는 여행만 하면 완전 다른 페르소나가 된다. 히어로물에 나올법한 그런 원더 OO 캐릭터 말이다. 


사전에 탐라 한달살이 여행 계획을 치밀하게 짜오 진 않았지만 이전의 시행착오를 다시금 겪지 않기 위해 난 아내에게 이번 한달살이는 휴식형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향을 슬쩍 내비쳤다. 한번 고민해 보겠단다. 어쨌든 한 달 전체 여행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결정이 되었다. 하루는 차를 타고, 하루는 도보로 여행을, 그리고 제주시 위주로 모든 바닷가와 유명 관광지를 훑는 것으로 말이다. ㅠㅠ


오사카의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탐라 한달살이가 과연 순조로울 수 있을 것인가???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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