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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Apr 19. 2022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오는 손님

#제주도 한달살기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 #시간이 약 #고민극복 3단계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단 둘이서 집을 떠나 꿈꾸던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생전 처음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침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하루 종일 오롯이 두 사람만을 위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소화하고, 그리고 소문난 현지 맛집을 찾아다니며 추억을 저장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첫사랑과 오랜만에 느끼는 소중한 이 시간만은 누구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주도에 내려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구순인 부친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폐부종으로 폐에 물이 차서 숨도 차고, 기침과 가래가 동반되는 증상이었다. 담당 의사 말로는 아마 노화에 따른 심장과 혈관기능의 저하 때문은 아닐까라는 조심스러운 소견과 함께 추가적인 정밀 검사와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혹시 모를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단 얘기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모친은 퇴직 후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내가 혹시나 신경을 쓸까 봐 내겐 연락도 하지 않으셨다. 입원 수속을 도운 작은 누나가 형제자매들에게 부친의 입원 소식을 알리는 과정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듣게 된 것이다. 여행을 멈추고 부친이 계신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코로나 확산 상황 속에서 보호자 이외엔 가족도 면회가 안되니 굳이 내려오지 말고 간 김에 잘 놀다 오라는 모친의 신신당부가 있어 출발을 잠시 보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내와 난 대역 죄인이 된 것처럼 맘껏 여행도 즐기지 못했다. 수시로 모친과 누나와 통화하면서 부친의 호전 상황을 전화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어 가슴이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머릿 속도 복잡하고, 딴 데 정신이 팔렸는지 난 차를 몰고 일 차선에서 유턴을 하다 좌회선 해서 오는 오토바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다. '쿵'하는 큰 소음과 함께 오토바이와 라이더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쓰러졌고, 충돌 파편이 주변에 흩어졌다. 순간 난 빨리 차를 인근 도로가에 세우고 사고 장소로 이동했다.  


마침 인근에 근무 중이던 경찰이 사건 현장을 목격한 후 신속하게 119 차량을 호출해 쓰러진 라이더를 실어 병원으로 호송시켰고, 잠시 후 도착한 경찰은 사고 현장 조사와 더불어 나의 자필 진술서를 확보한 후 자리를 떠났다. 사건의 경중에 따라서 검찰에 고발될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기면서 말이다. 바로 이어서 도착한 보험사 조사원은 곧바로 블랙박스를 확인하면서 자신이 볼 때 신호위반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대과실일 경우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어서 제주도까지 와서 이런 험한 상황을 겪어야 되나?'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일단 조사원의 추천한 대로 파손된 차량을 조심스럽게 몰고 인근 정비소에 가서 차량 사고 접수를 하고 수리를 맡겼다. 그리고 경황이 없어 다친 라이더에게 제대로 사과도 못한 것이 못내 맘에 걸려 그가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역시 보호자 외에는 면회가 되지 않는단다. 일단 전화를 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사과도 못해 진심으로 미안하고, 빨리 쾌차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니 상대방도 고맙게도 "너무 걱정 말라며, 전화해줘서 고맙다"며 밝게 화답을 해주었다.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사고 당일 오후 아내가 가장 아끼는 처제로부터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부고를 전화로 전해 듣게 되었다. 내일이 발인이라는 얘기에 우리 부부는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득불 처남에게 부의를 부탁하고, 동서와 통화라도 하려고 전화를 거니 받지를 않았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우리가 뭔 잘못을 그렇게 저질렀길래 이런 일들을 한꺼번에 이런 낯선 곳에서 겪어야만 하는가?'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에 머리만 복잡하고, 맘이 뒤숭숭한 가운데 아내가 조심스럽게 막내딸에게 온 문자를 내게 보여주었다. 몇 페이지에 걸쳐 쓴 장문의 문자였다. 내용을 보니 사는 게 힘들고, 학교도 다니기 싫고, 자신의 무능력함이 너무 싫다는 그런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황상 시추에이션인가??? 물론 간호학과 3학년 실습이 힘든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중이병을 겪고 있는 사춘기 소녀나 내뱉는 그런 말들을 그것도 여행 간 엄마에게 장문의 문자로 하다니 말이다.


아내와 난 아마 부모가 이렇게 장기간 집을 비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혼자서 밥 해 먹고, 잠자고, 실습까지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랬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마음을 추스른 아내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현재 심정을 자세하게 들은 후 조심스럽게 엄마가 당장 내려갈 수 없으니 일단 가까운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도록 딸을 설득했다. 다행히 내일 오후 실습 전에 상담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특별 처방으로 오늘 저녁은 밥 해 먹지 말고 딸이 가장 좋아하는 치킨을 사 먹도록 당부도 했다. 기분이 좋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아내와 오랫동안 꿈꿔왔던 달콤한 밀월여행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기야, 우리 힘들고, 상황이 안 좋아도 이왕 어렵게 여기에 온만큼 남은 기간은 어떻게든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교통사고 처리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고, 차량 수리가 끝날 때까지라도 가까운 곳부터 도보 여행을 하는 게 어떨까? 그렇지 않으면 머리만 복잡해질 테니 힘들어도 여행이라도 하면서 머리라도 좀 식히자."


내 말을 들은 아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기도 힘들고, 여행하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나로선 이게 어쩌면 차선의 방법이었다. 이전부터 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 데일리 카네기의 《행복론》에 나오는 '캐리어의 고민극복 3단계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 


첫째, 스스로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라.
둘째, 그것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셋째, 그런 뒤에는 침착하게 최악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라. 


이미 일어난 세 가지 일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머지 한 가지 딸의 사춘기 문제(?)는 우리 부부가 복귀하면 부부의 노력으로 충분히 개선이 가능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때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은 우리 부부가 받아들이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하고, 부부의 감내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며칠이 흐른 후 앞이 보이지 않았던 뿌였던 안개가 하나둘씩 걷히기 시작했다. 부친의 병세는 다행히 호전되었고, 1~2일 후에 퇴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교통사고로 가지 못했던 처제 시모상은 잘 끝났고, 오히려 우리에게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안부 전화가 몇 차례 와서 너무 고마웠다. 교통사고의 경우 불법 유턴이 아니어서 중대범죄에 해당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검찰로 인계되지 않고 경찰서에서 종결할 예정이란 담당 경찰관의 전화도 왔다. 딸은 다행히도 상담을 받고 약을 먹은 후 기분이 호전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그날 긴급하게 조치한 통닭 효과도 한몫한 것 같다.  


'불행은 한꺼번에 오고, 가장 행복할 때 실례도 없이 찾아온다'는 말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어쩌면 행복은 불행을 느끼지 않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지켜질 때가 바로 행복한 때란 걸. 그러고 보면 인생은 불행할 때보다는 행복할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눈앞의 소소한 행복을 보지 못할 뿐이다. 


마쓰시다 전기그룹 창업주인 마쓰시다 고노케는 자신의 성공요인을 '하느님이 주신 3가지 은혜' 덕분이라고 소개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둘째, 태어났을 때 몸이 몹시 허약해서 항상 운동에 힘써 왔기 때문에 늙어서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열심히 배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관점을 바꾸면 현재를 보는 프레임이 달라진다. 살다 보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너무 자신을 탓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불행과 행복의 양면을 모두 다 볼 수 있는 안목과 선구안을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상황이 안 좋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그런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가끔은 겸허하게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또한 개선하기 위한 최선을 노력을 함께 기울이면 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나머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 애마 수리가 깔끔하게 끝나 차량을 인도받게 되었다. 남은 기간 본격적인 우리의 여행이 다시 재개될 예정이다. 이번 여행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많은 아픔도, 좋은 추억도 함께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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