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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 Oct 05. 2023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냐고?

‘고민 해결사 펭귄 선생님’ by 강경수

아무리 1년도 안 만나고 결혼이 진행이 되었어도,

아무리 교회에서 만나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 몇 번 안 해봤다고 해도


너의 선택 아니냐, 이럴 줄 몰랐냐?


라고 묻는 시선들도 이해한다.

나도 타인의 일에는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 자기 일이 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도 있고, 나도 그때 지금의 나보다 많이 모자랐으니.


이제 와서 상담사 선생님과 연애 때 이야기를 하며 "아, 이거... 아스퍼거 맞네요."라고 싸한 기억들의 조각을 맞추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미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있는 입장에서는 매뉴얼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확신이 없을 땐, 이 사람이 이 기능이 없는 것이라 해도 소통이 안 되고 자꾸 어이없는 포인트에서 화를 내는 것이 억울하고 답답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수백 번을 자문하고 곱씹어봐도 이건 누구나 힘들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이 사람은 안 되는 거구나.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남편에게 결혼 생활 만족도를 물으면 9점이라고 해서, 나는 3점이니 님이 6점으로 행복도를 좀 양보해야 내가 올라갈 것이라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는 대화가, 소통이 안 되는데 어떻게 아무 문제없는 부부, 가정인거지?


여러 에피소드를 지닌 신혼을 지나(그럼에도 다 모쏠이라 모르나? 차라리 다른 연애를 해봤었다면 내가 보살이란 걸 알 텐데...) 우리는 부모가 된다.

양가의 도움이 없이 아이를 키우며 절어가는 나와는 달리 여전히 인생을 즐기는 나의 파트너.

남편은 매일 밤 애 다 재우고 나면 11시 넘어야 와서 방에서 새벽 2시까지 게임을 하다 잤지만 나는 너무 좋은 동네 육아동지들을 사귀어 공동육아에 가까운 연대로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아빠는 없고 아들이 둘인 기분이었지만 굴러갔는데 애 돌 즈음 남편이 큰 잘못을 한다. 잘못은 할 수도 있는데 그 잘못을 회피하느라 남편이 나와 아이를 탓하며 가정에 큰 불화가 왔었다. 이혼 위기였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배려 없는 태도에도 차마 생각하지 않던 결혼에 대한 후회가 몰려왔다. 한 번 후회라는 걸 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이 가라앉을까 남들이 다 왜 그러고 사냐고 해도 내 상황을 다큐가 아니라 시트콤으로 받아넘겼던 거 같다. 그런데 정말 그 사건은 심각했다. 그리고 동네 언니들이 같이 울고, 화내주던 그 시기에도 친정은 나를 외면한다. 그때 나는 한 번 더 상처를 받았었는데 그것 또한 엄마가 '나'를 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엄마'의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때는 정말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시간이라 주변인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지. 이렇게 한 발 떨어지면 보이는 것들이라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아빠로서의 남편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이 사람의 입장과 어려움도 이해가 간다. 결론적으로 관계에 서툰 사람이 처음 아빠가 되어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며... 본인의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 남 탓을 해버렸을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쨌건 결론적으로 엄마도 아빠도 불안정 애착인 사람들이어서 아이는 상처를 받았다.


하필 나의 첫 아이는 굉장히 섬세한 아들이었고, 감정에 한없이 서툰,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어려운 남편과는 참 맞지 않았다.

진심, 이 사람은 악의 없이...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은 헤아리지 못했다. 주말에 집안일을 많이 하면 내가 이 집 집안일은 다 하지(그대가 회사에 있는 동안도 우리가 여기서 나의 노동 아래 살아가고 있소)... 차를 옮기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안 해주고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을 거라고(왜냐면 자기가 아니까)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그때마다 열과 성을 다해 사실 관계를 밝히고자 학자처럼 싸웠다. 원가족과는 결이 다르게 나는 늘 억울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의 시작을 떠올려보면 나는 이 남자가 내 말을 잘 들어준다고 착각했었다.

이 그림책, 분명 재밌는 반전의 그림책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을 읽었을 때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고민을 해결해 주는 펭귄 선생님이 있다. 동물 친구들은 줄을 서서 펭귄 선생님을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다.

겨울이 오면 잠이 쏟아져 병일까 걱정하는 개구리도, 이가 많아서 고민인 악어도, 기분에 따라 얼굴색이 바뀌어서 고민인 카멜레온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는 원숭이도, 연어가 지겨운 곰도... 모두 펭귄 선생님 방을 나오면 기분이 좋아졌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퇴근 시간이 되자, 펭귄 선생님은 상담실에서 내내 끼고 있던 귀마개를 빼고 유유히 퇴근한다.

동물들이 펭귄 선생님이 내가 말할 때 귀마개를 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느낄 기분이 나의 기분에 가까울 것 같다.

잘 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적당히 해준 리액션이었다니...

나의 말을 늘 기억하지 못하는 게 건망증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라니...


그런데 다시 곰곰이 책 속 동물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원한 것이 딱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 말을 온전히 들어줄 사람... 모르는 게 서로가 행복한 해피엔딩이려나...


어쩌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지언정 나의 구남친(현남편)은 당시에 나에게 충실했던 것일까?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 나는 엄마들과의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뮤즈 그분은 다른 면모에서 나에게 상담사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소리 지르고 화를 못 내던 내가 너무너무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게 하고는 유유히 이렇게 말한다.

마치 나를 위해 일부러 연출한 것처럼

"그래, 넌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고 이런 게 좀 필요했어. 못 했잖아. 내가 널 도와주는 거야."

내가 즐기는 풍자와 해학의 유머 맞는데 당사자 입에서 들으니 왜 이리 얄밉던지.

그런데 놀랍게 그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부부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라 본인은 나의 화를 채워줬다고 또 이야기했다는...


그렇다. 나 이제 화 잘 내. 건드리지 마. 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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