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내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에 깊이 빠진 것도 아니었다. 이리저리 오가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선잠에 들었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잠이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아 책을 펼치면 다시 잠이 쏟아졌다. 눈을 감으면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고 싶은데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시간을 보냈나? 명확하지 않은 두뇌가 별별 생각을 다 떠올린다. 큰 딸이 오더니 옆에 누워서 끌어안았다. 둘이서 그렇게 눈을 감고 조는 듯 마는 듯 있었다. 어느덧 4시 반이 넘어간다.
쿠키가 먹고 싶었다. 버터향이 가득한 바삭바삭한 쿠키. 고급 제과점의 비싼 쿠키가 먹고 싶었다. 보통은 크림이 들어간 부드러운 케이크를 좋아하는데 오늘따라 쫀득하거나 부드러운 질감이 아닌 바삭하게 가루가 사르르 흩어지는 쿠키가 절실했다. 사러 갈 힘이 없으니 배달을 시킬까. 나는 하나만 먹으면 될 것 같은데 제과점에서는 세트로 판매하고 가격이 왓? 3만 원??? 아무리 비몽사몽이지만 이 가격은 안 되겠다. 딸에게 졸랐다.
"엄마 쿠키 만들어 줘....."
딸아이가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누나! 난 그 뭐지. 계란 흰자로 만든 거 먹고 싶어. 만들어 줘."
큰 아이는 머랭쿠키의 장인이다. 흰자를 삼십 분 가까이 손으로 저어 아주 예쁘게 머랭을 잘 만들었다. 큰 아이는 다시 이불로 얼굴을 가리더니 도망가 버렸다. 주문하기 비싸니 그냥 만들어 먹을까? 버터도 밀가루도 설탕도 있는데. 아.... 그런데 힘이 없다. 냉장고에 어쩌면 이렇게 먹을 게 하나도 없다니. 방학이라서 군것질 거리는 사놓는 족족 다 사라지고 냉장고에 유일하게 있는 것은 식빵 봉지들 뿐이다. 이제 5시가 되어간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호밀식빵 하나를 토스터기에 넣었다. 커피를 내리고 버터와 마멀레이드를 꺼냈다. 갈색이 돌게 잘 구워진 빵에 버터를 올리고 마멀레이드를 올렸다. 비록 바삭한 버터 쿠키는 아니지만 바삭한 식빵에 버터와 상큼한 마멀레이드는 아쉬운 대로 만족스러웠다. 먹으면서 조금씩 힘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오후 내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그렇게 보냈지만 낭비는 아니라고 여겨졌다. 나에게 필요한 순간이었나 보다.
방학이 끝나기 마지막 주. 이 더운 여름날 아들은 야구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몇 시간씩 야외에서 더위에 눌려서 이틀을 보냈다. 어제는 조카들을 봐주겠다고 영화관에 데리고 갔다가 이리저리 통통 뛰는 둘째 조카 덕에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다. 저녁에 간 피아노 레슨에서 선생님이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냐고 놀라실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또 오전에 야구 시합을 위해 바깥에 앉아 있었다. 더위를 먹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쉬지 못해서 힘들었던 것일까.
평소에 먹지 않는 라면을 아들과 둘이 나눠 먹으면서 반드시 누워서 낮잠을 자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설거지도 해야 하고 거실과 화장실 청소도 해야 하고, 운동도 조금 더 해야 하고 내일이면 끝나는 원서 읽기의 마지막 주간 분량도 읽고 정리해야 하며 요새 잡힐 듯 말 듯 애태우는 피아노 연습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나는 그냥 누웠다. 해야 할 일들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깨면서도 그냥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토스트를 먹고 나니 그토록 미친 듯이 먹고 싶었던 버터 쿠키가 더 이상 그립지 않다.
다시 의지가 생겼다. 쌓인 설거지에 도전할 의지.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할 의지. 그러고 나서 책을 읽을 의지. 또 운동을 할 의지. 비가 쏟아졌다. 둘째를 마중하러 나갈 힘도 생겼다. 그래서 쉬나 보다. 그래서 먹나 보다.
사족. 버터링 쿠키와 다이제를 사 왔다. 셋째가 환호했다. 내가 먹고 싶어질 때까지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