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희 마리아 Aug 30. 2024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

나는 책을 구입하면 앞 장에 책을 산 날짜와 장소를 기입하고 서명을 하는 습관이 있다. 이 책도 살펴보니  이 년 전인 2022년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에 구입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움직이는 명절의 대이동 기간에 부모 찾아 내려온 아이들과 함께 오붓하고 즐거운 명절 준비를 해야 마땅할 시간에 왜 집이 아닌, 아무도 없고 천 리도 더 떨어진 낯선 땅 가평에서 이 책을 구입했을까?    

온 나라가 설 명절로 술렁거리고 민족의 대이동이 한창인 시점에 나는 집에서 나왔다. 가출을 한 것이다. 60이 넘은 중늙은이가 모두가 귀향하고 귀가하는 명절을 뒤로 하고 참담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집을 떠나 잠적한 것이다. 위로 90이 넘은 시어머니의 며느리, 여덟이나 되는 시가 형제들의 올케와 형수, 그리고 직계로는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도합 여덟이나 되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어쩌자고 집을 떠나 낯선 경기도 지역을 떠돌고 있는지..... 경기도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완벽한 타지였다. 그것이 그곳으로 숨어든 이유였다.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명절에 시어머니와 식구들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시어머니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시집살이가 심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섯이나 되는 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마치 여왕처럼 군림하였다. 남편 잃은 불쌍한 어머니라는 것을 앞세우며 어머니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것이 효도라는 자식들의 묵인 아래 말도 안 되는 감정적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잘못된 일 같으면 해결하고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감정적인 것은 해결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교묘하게 가해지는 상황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었고 듣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만 참아내면 집안이 조용하겠다 싶었고 더 크게는 어머니와 심정적, 암묵적으로 한 통속이 된 여섯이나 되는 시누이들의 숫자가 무섭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시집살이는 당연한 것이었고 견디고 겪어내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던 때였다. 물론 일방적인 경우는 없기 때문에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였고 결혼이 무슨 죄라고 홀로 들어온 며느리를 그 많은 숫자의 식구들이 함께, 은근하게 노골적으로 짓누르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난 세상의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가족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 피를 나눈 혈연들끼리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쌓여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색깔들을 덧칠한 유화와 같이 칙칙한 감정들이 두텁게 자리 잡았다. 피도 나누지 않고 결혼이라는 제도로 한 식구가 된 시댁과의 관계는 더 설명할 단어가 없을 정도로 기묘하였다. 가장 따스하고 가까워야 할 족 관계가 가정이라는 비밀스러운 울타리 안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인 관계로 맺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울타리 밖에서는 화목한 가정의 일원으로 보여야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폭력이란 생각도 안 들었다. 당연히 겪어야 할 시집살이겠거니 생각했다. 참으면 되고 시간이 지나면 한 식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애들 키우기, 사회 생활 하기 등으로 바빴던 딸들이 나이 들어 어머니를 자주 찾게 되자 어머니는 당신의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었다. 나를 보면 항상 화가 나 있었고, 항상 불편하셨다. 뭔지도 모르는 지저분하고 개운하지 못한 감정적인 피곤과 에너지의 소모는 사람을 지치게 했고 메마르게 했다. 그런 이상한 관계는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는데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것은 폭력이었다. 가정 폭력, 감정 폭력.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가정 내의 폭력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하고 은밀한 것이어서 가장 지능적이고 나쁜 폭력이었다. 나아지겠지. 참으면 되겠지 해왔는데 도가 넘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폭력에 끝까지 굴종하는 것은 나의 비겁함 때문이라는 정신이 들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호의적이지 않은 시댁 식구들과 맞서는 것이 무서웠고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참아내자고 했던 나의 비겁함을 끊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정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버리자 자유스러워졌다. 아이들도 다 결혼하여 내 역할은 끝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명절 무렵 어느 곳에서도 여행 아닌 가출을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아무 곳에나 갈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다 한 번 간 적이 있는 수도원을 알아보았다. 거기서도 명절 전야의 손님은 원하지 않았다. 난, 명절 뒤에 이어지는 프로그램에 참가한다는 조건으로 미리 가서 있고 싶다고 사정을 하였다. 내 목소리가 비장해서인지 오라고 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택시를 타고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은 다 그렇듯이 깊숙한 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 한 몸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최소한의 안전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있는 곳은 세상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수도원에는 지키는 최소 인원들만 있었고 그들이 먹는 밥을 끼니때마다 옆에서 혼자 먹었다. 수도원 사람들도 나의 비장함을 보았는지 말을 걸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흥성해야 할 설 명절 전날, 수도원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런 명절 전야는 처음이었다. 항상 명절 준비로, 성묘 준비로 분주하고 바빴던 명절 전날이었는데 혼자 동그마니 떨어져서 지독히도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이 너무도 낯설고 더디 갔다. 명절 전야의 시골 풍경을 보고 싶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갔다. 그렇지만 도시와 다르게 시골의 명절 전날은 한가하였다. 상가도 이미 손님이 끊긴 파장 분위기였다. 떠나온 남녘에서는 맛볼 수 없는 윗 지방의 세밑 추위가 옷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작은 읍내의 스산한 풍경도 심란하였다. 그렇지만 당당한 척, 폼 나는 척, 여유로운 여행자인 척하면서 좁은 읍내를 돌다가 한 귀퉁이에서 책방을 발견하였다.   

    

 <북유럽 서점>이라는 멋진 상호에 끌리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문을 밀고 들어섰다. 중년의 두툼한 주인이 혼자 서점을 지키고 있었다. 한가한 척, 교양인인 척하며 책들을 구경하였다. 그러다가 눈에 띈 책이『명랑한 은둔자』였다. 제목이 먼저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는 책표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표지를 넘기자 나온 작가 소개와 작가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다. 책을 사 들고 나왔다.


나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제목. 그래, 나는 지금 세상을 피해 들어온 은둔자야. 그렇지만 비참해지지 않을 거야. 은둔이지만 내가 선택한 자발적 은둔, 은둔을 하더라도 명랑한 은둔자가 될 거야라고 심각하게 결심하면서 책을 집어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그리고 설날이 되었다.   

  

저자인 캐럴라인 냅에 해서 책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캐럴라인 냅
            Caroline Knapp      

지적이고 유려한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를 쓴 작가.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1981년 브라운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살면서 몇몇 끔찍한 중독에 빠진 경험이 있는데,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이런 자신의 깊은 내면 이야기를 솔직하게, 우아하게, 또렷하게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Drinking>은 알코올 중독의 삶을, <욕구들 Appetites>은 다이어트 강박증과 섭식장애에 관한 기록이다.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 Pack of Two>는 개를 향한 지나친 애착을 다룬다. 자신을 직시하며 그 감정과 생각의 결을 낱낱이 드러내는 글쓰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캐럴라인 냅은 이 책 《명랑한 은둔자》에서 혼자 살고 혼자 일했고, 가족과 친구와 개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달은 저자로부터, 우리는 만난 적 없지만 오래 이어온 듯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재능이다.
(책 앞면 날개 인용)

책을 소개하는 번역가의 글이 길었다. 보통 번역가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 책에서는 옮긴이의 말이 책의 서두에 길게 실려 있었다.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나는 책이 좋고 책 만드는 것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인생보다 혹은 인생만큼 대단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다. 최소한 하나의 사례를 아는 셈이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4쪽.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 긴 글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줄여도 괜찮을 듯싶다. 자, 여기 책으로 저를(아주 조금이지만) 바꾼 작가를 소개합니다. 그립고 기쁜 마음으로. 9쪽.

번역가는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고 자신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쓰면 사람을 바꾸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금했고 부러웠다. 책의 제목이 되는 명랑한 은둔자에 대해 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때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 말을 듣는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것은 정말 마술적이고 변혁적인 순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만화경같은 변화랄까. 나 자신에 대한 기정사실들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더니 새로운 질서에 따라, 놀랍고 신선한 시각에 따라 재구성되어 내 내면이 삽시간에 재편되는 듯한 순간이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뀐다. 기존의 정의가 새로운 전개를, 새로운 분위기를, 새로운 의미를 취한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 말을 다시 들어보라. 산뜻하고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가 어제–한 시간전, 10분 전이라도 마찬가지다-내게 내 존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보라고 말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나는 독신 여성이에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서른여덟 살이고, 좀 외톨이처럼 살아요. 이 말이 슬픈 노처녀를 연상시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목소리에 변명의 기미가 어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휴,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지금이면 진작 결혼했어야 하는 건데. 하고 말하는 듯이 약간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리얼 그릇을 앞에 두고 서 있던 순간, 내 정신의 만화경이 살짝 돌아가더니 변명은 흐릿해지고 대신 새로운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 새로운 장면은(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까?) 행복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41쪽.

냅이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가족과 이웃들의 걱정에 대해 냅은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맞아, 나는 은둔자야. 사람 만나는 것도 꺼려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 그렇다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독신 상태가 그렇게 불행하고 안되기만 한 것은 아니야. 물론 어쩌다 의기소침하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지만 그건 누구나 다 그런 것 아니야? 나는 은둔자 맞아. 그렇지만 불행하고 외로운 은둔자가 아니라 명랑하고 즐거운 은둔자라고. 말하는 냅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동기가 그래서 그렇지, 그때 내가 처한 환경은 내가 그렇게도 꿈꾸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에 복잡하지 않기, 홀로 있기, 내가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 하기, 어슬렁 거리기, 적당히 고독하기 등 집안 분위기좋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혼자 있는 내가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나는 지금 세상을 피해 들어온 은둔자야. 그렇지만 비참해지지 않을 거야. 은둔도 내가 선택할 것이고, 은둔의 성격도 내가 결정할 거야. 이제 눈치 보면서 살지 않을 거야. 은둔이지만 내가 선택한 자발적 은둔, 은둔을 하더라도 명랑한 은둔자가 될 거야. 등등의 각오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주일을 은둔하면서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나는 짐을 싸 들고 속세로 내려왔다. 은둔이 끝까지 허락되지 않는다는 자각이었고 은둔을 끝까지 선택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차례     

4    옮긴이의 말   

   

     홀로     

15   혼자 있는 시간

26   수줍음의 옹호

40   명랑한 은둔자     

 

     함께     

53  쌍둥이로 산다는 것

61  우리를 묶는 줄

67  살아남는 관계라는 범주

72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사랑받고 싶을 때

82  나는 영원히 곁에 머물 수 있을까

89  조이에게 보내는 편지

95  이 우정은 잘되어가고 있어

104 개와 나

110 이런 사교의 기쁨      


     떠나보냄     

119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본다는 것

124 사랑하는 사람을 차차 떠나보내기

129 회복으로 가는 먼 길에 대하여

134 어머니의 그림

141 세월의 디테일

146 모녀의 관계가 주는 가르침

152 맑은 정신으로 애도하기

157 음식이 적이 될 때

177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는 법

183 외로움에 관하여

188 더 이상 곁에 없는 사람을 수용하는 것

194 술 없이 살기

200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213 마취제 없는 삶   

  

    바깥     

229 이름의 사회학

235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자들의 태도

241 착한 건 그만

246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오용

252 이탈리아인이 되고 싶어

255 사람들이 무엇을 못 버리는지 살펴볼 것

260 노인의 존엄에 관하여

265 깔끔쟁이의 문제

270 집의 개념을 다시 만들기

276 재난에 의한 감정적 과부하


     안     

285 그냥 보통의 삶

291 여름을 싫어하는 인간이라니

296 내가 살 곳을 정하다

302 입을 옷이 없어

308 마음 또한 하나의 근육

314 작은 전이들

320 분노 표현의 기술

326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들

332 바비도 현실을 산다

338 내 인생을 바꾼 두갈래근   


이전 10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백과사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