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관한 글이 많다. 웅변에 관한 글도 많다. 어느 때는 말을 잘하고 싶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침묵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침묵만 할 수 없고 말만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의 참선 수행 전문가로 알려진 마르크 드 스메트의 『침묵 예찬』을 읽었다. 책의 제목에서처럼 침묵에 대한 찬양과 긍정의 글인데 꽤 어렵고 전문적이어서 쉽게 읽히지 않았다.
저자는 글의 첫머리에 ‘앙리 미쇼는 파울 클레의 첫 그림 전시회를 보고 “ 그 엄청난 침묵에 허리가 휘어져” 돌아와서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밝힌다. 프랑스 문학과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파울 클레라는 화가의 이름도 처음이었고 마르크 드 스메트라는 이름도 처음이었다. 찾아보니 파울 클레(Paul Klee)는 스위스 출신의 현대미술 작가로 추상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파울 클레의 어떤 작품이 스메트로 하여금 엄청난 침묵에 관한 생각을 하게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스메트는 침묵의 어원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불어로 침묵 silence이란 말은 12세기에 처음 등장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1190년이다. 그 단어는 라틴어 silentium의 정확한 번역이다. 고 불어는 라틴어 silere를 본떠서 침묵하다라는 뜻의 동사 siler를 차용했다. 오늘날 그 단어에서 파생한 형용사 silencieux, 부사 silencieusement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고대 로마에서 물려받은 명사 silenciaire도 있다. 이 말은 노예들이 침묵을 지키도록 감시하는 장교, 거기서 확대되어 트라피스트같이 절대 침묵을 지키는 수도자들과 오랫동안 묵언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9쪽.
그리고 침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침묵이란 바로 여러 가지 소리들로 구멍 뚫린 시간이다. “ 미소 지으며 침묵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발레리의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7쪽.
- 침묵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나아가서는 의식이 인지할 수 있는 소리들이 상대적으로 부재하는 어떤 환경 속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또 침묵을 의식의 고유한 내적 태도로 정의할 수도 있다. 즉 침묵하는 행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위와 심리를 소리 없이 건드린다. 30쪽.
침묵에 관한 여러 나라의 속담을 소개하기도 한다.
- 여러 나라의 지혜가 담긴 속담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프랑스 속담은 이르기를 침묵은 금이라 한다.
독일: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말하라.
이스라엘: 제대로 침묵하는 것이 제대로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탈리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침묵할 줄만 안다면 그는 충분히 아는 것이다.
루마니아: 침묵도 대답이다.
스페인: 듣고 보고 침묵하라. 그러지 아니하면 삶의 쓴맛을 보리라.
덴마크: 절약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입부터 절약해야 한다.
터키: 현명한 사람의 입은 그의 가슴속에 있다.
중국: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말을 하고도 아무 말도 안 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일본: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은 말들은 침묵의 꽃이다.
그리고 끝으로 한국: 나이를 먹으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라. 얼마나 많은 나라에 얼마나 다양한 침묵들이 존재하는가!
그 밖에도 스핑크스의 침묵, 향기, 냄새, 색깔의 침묵, 다도, 밤, 꿈의 침묵, 하나하나의 몸짓과 계절과 날들의 침묵이 있다. 침묵은 호흡만큼이나 중요하다. 어쨌든 침묵은 잠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다. 15쪽.
여기에서 한국의 속담이라고 소개한 부분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먼저는 외국의 작가들이 한국의 독자들을 배려하면서 글을 써야 할 정도로 독서 강국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침묵에 관한 수많은 우리나라의 속담과 격언 중에 더 멋지게 표현한 말들이 많았을 것인데 이것을 우리나라의 대표 속담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일까. 그리고 저자는 이 속담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용하였을까 하는 점이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 상당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의식하지 못하고 이루어지는 침묵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 소리는, 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나오고 또 침묵으로 돌아간다. 94쪽.
- 우리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말 한 복판에 우리들 자신의 침묵이 존재한다. 침묵의 유형학을 수립해 보려고 노력하는 미국 과학자들 가운데 브뤼노는 최초로 침묵을 뇌의 프로세스와 관련지어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텄다. “ 우리는 여기서 언어를 해독하는 데 사용되는 두 가지 형태의 언어심리학적 침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속시간이 짧은 이른바 ’ 빠른 침묵‘과 지속 시간이 긴 이른바 ’ 느린 침묵‘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말의 중간중간에 잠시 휴지 하거나 생각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것도 침묵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휴지가 길면 ’ 느린 침묵‘. 휴지가 길면 ’ 빠른 침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침묵 속에 들어있는 상징과 느낌에 대해서도 말한다.
- 침묵에는 우리들 삶의 무한한 뉘앙스들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침묵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장소들과 존재의 양상에 대하여, 마주치는 정황들의 질감과 특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준다. 침묵은 우리의 내밀한 동반자요 항구적인 배경이다. 모든 것이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심오한 의식의 장소인 침묵은 우리의 시선, 경청, 인지의 바탕이 된다. 8쪽.
- 반대하는 의미를 가진 불안하고 부재하는, 혹은 딴전 피우는 침묵은 소통을 가로막거나 소통이 그 본래의 교환과 참여의 기능에서 벗어나게 한다. 반면에 유연하고 관심 깊고 진정으로 공생적인 침묵 속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경청은 장래성 있고 개방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133쪽.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았고 침묵에 관한 여러 분야의 너무 많은 이론들을 소개하는 바람에 오히려 산만해진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은 이곳이다.
- 책을 앞에 펴 놓고 우리는 절대적인 침묵 속에 빠져들며 완전히 혼자가 된다. 137쪽.
- 도서관이나 서점의 침묵은 얼마나 섬세하고 황홀한 침묵인가. 거기서 우리는 발길을 멈추고 표지와 제목과 페이지에 눈길을 던지며 메시지와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들을 찾아 책장을 들춰보고 거의 냄새를 맡듯이 책 페이지들을 쓰다듬으며 실감으로 전신의 모든 감각으로 ’ 느껴 본다 ‘.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