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책을 선택하는 경로는 다양하다. 나는 신문에서 읽을 책의 실마리를 얻을 때가 많다. 내가 즐겨보는 신문의 코너 중의 하나가 「오늘의 문장」이라는 코너이다, 여기에서는 감명 깊거나 의미 있는 문장들을 소개하면서 그 문장의 출처를 밝혀준다. 그러면 나는 그 코너를 통해 소개받은 책을 찾아간다. 내가 혼자서 읽을 책을 검색할 때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낮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신문에 이런 문장이 소개되었다.
“좋은 질문은 겸손한 자세이자 모르므로 배우고 싶다는 고백이며,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중략) 당신이 한 사람을 잘 알게 되었다고 치자. 이는 당신이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마법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게 하는 질문 기술을 당신이 지녔기 때문이다.”
중앙일보 아침의 문장, 2024.04.16.
이 문장을 지팡이 삼아 찾아간 책이 데이비드 브룩스의 『사람을 안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브룩스는 사람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수수께끼”라며 “수많은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을 때는 질문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고 덧붙이고 있다.
저자 소개 부분에서 『사람을 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내 삶에서 관계로 인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심리학, 철학, 문학,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길어낸 통찰은 한 가지 주제에 깊게 몰두한 저자의 저력을 보여준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그리고 누군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완벽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제목이나 내용 소개에서처럼 이 책은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더 바람직하게 해 가는 것에 대한 연구이자 조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독서 경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람마다 독서에 편향성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책을 고르고 읽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균형 잡힌 독서를 하려고 해도 골라낸 책이나 읽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비슷한 것을 고르거나 읽는 경우를 본다. 이것이 나의 취향이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라고 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철학 계통 아니면 자기 계발 계통의 책들을 많이 찾아 읽는 편인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른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 인간과 인생에 대한 관심사가 나로 하여금 그런 계통의 책들을 찾아 읽게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첫 부분에서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을 발견했다.
..... 모두가 환대받는다고 느끼는 모임을 만드는 것...... 20쪽.
여기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우정을 쌓거나 공동체를 만드는데 내가 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이 어떠하냐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나 내가 만드는 공동체, 또는 나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모임을 이루어 왔는가를 생각하였다. 가장 기본적 공동체인 가정을 생각하였다. 내가 주체가 되어 이룬 가정에서 가족들은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니었다. 나는 가정을 따뜻하고 환대받는 곳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살벌하고 불편한 곳으로 만들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부당하다는 이유로,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가족 간의 관계가 힘들다는 이유로 온갖 불평과 짜증과 분노를 가족에게 쏟아내었다. 내가 이룩한 가정은 스위트홈이 아니라 유리 조각을 밟는 것 같은 예민함과 긴장의 장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성장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떠난 지금에야 나는 가정은 구성원 모두가 사랑받고 환대받는 곳이어야 했음을 깨달으면서 뒤늦은 후회를 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내가 속한 어떤 공동체든지 그곳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고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개념이 있다. 사람을 ‘디미니셔 diminisher’와 ‘일루미네이터 illuminator’라는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제 능력을 믿고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디미니셔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즉 디미니셔는 타인을 친구가 될 사람이 아니라 이용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디미니셔의 레이더에 타인은 잡히지 않는다. 26쪽.
반면 ‘일루미네이터는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둔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기술을 따로 훈련받았거나 스스로 깨우친 사람들이다.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그리고 상대방에게 언제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관심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그들이 자기 자신을 더 크고 더 깊고 더 존중받는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26쪽.
저자는 우리는 모두 디미니셔에서 일루미네이터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일루미네이터는 다른 사람의 온전한 인간성을 바라보도록 마음이 훈련된 사람인데 이 능력은 타고나거나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얻게 되는 종합적인 기술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기술이므로 이전과는 다른 의식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의 기술을 연습한다면 누구나 일루미네이터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영혼이라는 개념을 한번 믿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날씨 같은 사소한 문제로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면,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라.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무게도 없고 크기도 없고 색깔도 없고 형태도 없지만 무한한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하는 자기 존재의 어떤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의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한다면, 모두가 자기 내면에 초월적인 불꽃을 가지고 있으리란 사실을 알 것이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동등함을 알 것이다. 힘이나 지성, 재산에서는 동등하지 않더라도 영원 차원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만약 당신이 마주치는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소중한 영혼으로서 바라본다면, 당신은 그들을 소중하게 대하게 될 것이다. 53쪽.
한 사람이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은 인생의 교훈, 인생의 시련, 인생의 놀라움, 그리고 인생의 일상적인 일들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의식을 가다듬어서 더 깊은 이해와 지혜와 인간성과 은혜로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109쪽.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던 문장을 책에서 찾아가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질문을 도덕적 실천으로 여기게 되었다. 좋은 질문은 겸손한 자세이자 모르므로 배우고 싶다는 고백이며,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자기는 충분히 영리해서 타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드러난 증거로 판단하자면, 그런 상상은 대부분 틀렸다. 사람들은 서로 너무도 다르고 너무도 복잡하며 너무도 독특하다. 133쪽.
원문과 인용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필요에 의한 자의적 인용은 가능하지만 원문을 찾아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부분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섭고 가슴 아프게 왔던 부분은 여기이다.
그가 읽던 소설의 한 구절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때렸다. “오늘 아침, 낯선 사람의 손이 내 눈을 영원히 감겨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혼자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내 눈을 감겨 주는 수밖에 없었다.” 89쪽.
얼마나 무섭고 가슴 아픈 이야기인가.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내 눈을 감겨 주고 끝내야 하는 인생. 우리가 디미니셔가 아니라 일루미네이터가 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에서도 일루미네이터가 되는 것은 어렵고 이상적인 것이지만 일루미네이터가 되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루미네이터가 되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지만, 대부분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드럽고 관대하고 수용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환하게 비추려고 애쓴다면, 적어도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1쪽.
우리는 모두 외롭다. 고독하다. 따뜻함을 원한다. 사랑을 갈구한다. 언제부턴가 도덕을 버리고 기본을 버리고 사람을 존중과 동행의 대상이 아닌 경쟁과 이용의 대상이란 물질적 차원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얻게 된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도덕과 배려와 존중과 동행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력한다는 것은 적어도 바른 방향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