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엉켜버린 아빠와 아들의 실타래

평범한 사람의 인생이란 드라마 - 가족

by 장병조

나와 다른 누군가를 존재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서로의 행동이 늘 못마땅하고 불편하다. 항상 서로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저 말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꽤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니까, 다 당신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사랑하는 건 맞는데, 그래도 이런 건 좀 고쳐야지. 어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지만,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야 되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서로를 서로에게 맞춰가며 살아야 한다. 상대방이 잘 되길 원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과연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이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해를 뜻한다면, 이런 식으로 서로를 맞춰가는 것은 완전히 틀린 방식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한다면, 상대방이 잘 되길 바라기에 앞서, '잘되고 싶어 하는가'를 묻는다. '너'를 '나'에게 맞춰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너'에게 맞추게 된다. 즉,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사람을 배려한다. 늘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틀에 당신을 맞춰가려 하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이해와 수용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 서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반쪽짜리 하트 두 개가 만나면, 서로를 맞춰가는 긴 과정 끝에서 하나의 하트로 합쳐질 수 있다. 물론 아름다운 하나의 하트가 될 수 있지만, 그 둘의 접합부위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어렵다. 즉,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완성된 하트 둘이 만나면, 하트 두 개로서 살아가면 된다. 서로가 다른 모양의 하트라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면서 동반자로서 살면 된다.- 그렇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에게 맞추려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특히 아빠와 관계에서는 항상 그랬다. 나는 아빠를 나에게 맞추고 싶어 했고, 아빠도 나를 아빠에게 맞추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갈등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빠와 아들 사이는 하트는 물론 아니었고, 굳이 표현하자면 그냥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태래 같았다. 정말 정확한 표현이다.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린 실타래"


아빠와 나는 너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고, 너무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최근에는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우선, 아빠와 나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아빠는 흔히 말하는 '선비', '유교남'이다. '효'와 '도리', '우리'를 중시한다. 그렇지만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나의 생활, 나의 시간, 나의 것이 강조되는 삶을 산다. '도리'보다는 '실용성'을 생각하고 '우리' 보다는 '너와 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는 겉보기엔 굉장히 사소해 보인다. 별 거 아닌 듯싶다.

하지만, 이 작은 분열이 계속해서 누적되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실타래가 여러 번 엉키고 꼬이게 되면, 누구도 풀 수 없는 골칫덩이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들이다.


"가족이 꼭 한 집에 있다고 해서 밥을 같이 먹어야 돼?"

"명절 연휴에는 집에서 쉬면 안 돼?"

"나도 제발 나만의 시간을 좀 갖자"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게 실용적이고 도움이 되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야?"

"고령인구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사회와 본인, 가족의 공동 책임이 아닐까?"


이 사소한 것들은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를 완전히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어졌고, 알게 모르게 서로가 불편해졌다.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언제 시작되었고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떤 시도를 해야 하는지, 그 정답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사소한 것들이 뒤엉켜 있어서 두 눈으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한 노력이 그것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이 실타래는 반드시 노력해서 풀어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빠가 항상 입에 담았던 자식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빠는 점점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산책을 가자고 해도 묵묵부담. 말을 걸어도 시큰둥. 밥을 먹을 때도 늘 소주와 함께.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들이 힘들어져만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샤워를 하던 도중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기억이었다.

내가 아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작은 도움을 주게 될, 사소한 의문이었다.

"아니 근데 도대체 왜 아빠는 맨날 나한테 비누칠을 부탁한 거지? 집에 도구가 이렇게 많은데..??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등에 비누칠하는 게.. 그러니까 그게.. 나를 일부러 매일 부른 건가?"


샤워를 하면서, 잠시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머릿속에서 동영상을 재생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빠는 내가 어린 시절, 항상 나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일곱부터 열일곱까지 십 년은 아빠의 등에 비누칠을 한 것 같다. 피하고 싶어도 피하기가 어려웠다. 생활패턴 때문이었다. 아빠는 새벽 열두 시 반에 출근했다. 시장에서 일을 했고, 오후에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씻고 누울 때 즈음 나는 하교를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나는 늘 아빠의 부름을 받았다.


"아들~ 와서 등에 비누칠 좀 해 줘"

"아니, 그런 건 좀 혼자 하면 안 돼? 나도 쉬고 싶단 말이야 진짜"


하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나인지라 항상 가서 비누칠을 해주었다.


"아들, 그, 손에 물 묻히고 비누칠 좀 빡빡해봐 빡빡"

"(......)"

"그래 거기 위에, 조금만 더 위, 그래 거기 잘 좀 해 봐~"

"다 했어"

"아 거 참, 성의 있게 좀 하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아빠의 표정은 정말 밝았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욕 의자에 비해서 아빠의 몸은 우람했고, 언뜻 기억하길, 항상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너무 하기 싫어서 아빠의 등에 스크레치를 내기도 했고, 죽을상을 짓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아빠의 표정은 늘 행복해 보였다. 그게 아빠가 원하는 가족, 행복 그리고 '우리'였던 것 같다.


사실, 하루 24시간 중, 아빠와 내가 마주하는 시간은 그게 거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내가 방문을 굳게 닫고 지냈으며, 누가 말을 거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어느 날부터 아빠는 퇴근 후면 늘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동의 공간에서 오랜 시간 개인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잠도 꼭 거실에서 자고, 음악도 거실에서 듣고, 사실상 거실이 아빠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방에서 거실로 나가면 잔소리든 뭐든 일단 쏟아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턱을 넘는 게 더 어려워졌다. 시간은 점점 더 흘렀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아빠의 등을 밀어주는 일조차 없어졌다. 아니, 마주치는 일조차 없어졌다. 아빠가 안방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아빠 혼자 노력해왔던 것을.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홀로 노력해 왔는지 몰랐다. 아빠의 노력을 이제야 알았다. 노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감정 표현이 서툴렀고, 시장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거실에서 그저 아들을 기다렸고, 서투른 마음이지만 어떤 말이라도 걸고 싶어 했다. 젊음을 바쳐 일했고, 자식들만 보면서 살아왔다. 가까워지려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아빠는 이제 지칠 만큼 지친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 같은 사이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나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서 '효'라는 명목 하에 내가 원하는 관계, 예전과 같은 관계를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MZ세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인 강요, 그것을 내가 아빠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빠는 더 이상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우리'의 삶이 아닌 '아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를 이해하고 나니, 아빠에 대해서 두 가지를 더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두 가지, 세 가지를 더 알아가면서 엉켜버린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가고 싶었다. 아빠라는 사람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반갑지 않은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모두 풀어나가기에는, 하나씩 모두 풀어내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아빠는 내년이면 육십이다. 비록 세상은 백세 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사람들의 평균 건강수명은 약 65세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다. 자의든 타의든 경쟁 사회에 뛰어든 이상 바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실타래를 모두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주어질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것일까"

"세상은 왜 이렇게 야속할까"

"사람은 왜 항상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일까"

"과연 내가 엉켜버린 아빠와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다음 이야기인 #5와 이어집니다. 약 일주일 뒤에 다음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