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박중독자의 승.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살았다. 무엇이든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중독에 대한 거부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친척 중 알코올문제를 겪는 분이 계셨는데 가끔 만취해 우리 집을 찾을 때면, 온 식구가 붙들려 술주정 고문을 당했던 기억이 너무 강렬했다. 정말이지 그날은 너무 괴로운 날이었다. 특히 시험기간이라도 겹치면 공부를 할 수가 없으니 정말 엉엉 울고 싶었다. 게다가 아빠는 술, 담배, 복권 등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도 일부 받은 것 같다. 물론 아빠에게도 다른 형태의 문제가 있었지만, 뭐 일단 어쨌든.
그런 기저에서 비롯된 나쁜 습성도 있었는데, 무언가에 숙달되었다 싶으면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더 깊이 파면 삶이 그것에 좌우될까 두려워, 깊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일종의 회피성향이 있었다. 인간관계 또한 비슷했다. 친구든 누구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이성관계 또한 나의 가치관과 결이 맞지 않으면 고민 끝에 관계를 정리하곤 했다. 그런 내가 깊고 오래 유지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와의 시간이었다. 내 생애 유례없이 친밀한 인간관계였다. 일평생 어느 누구와도 그렇게 가까이 지내본 적은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처음 그를 알게 되고 찬찬히 지켜보는 시간을 거친 후 그는 소위 '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음에 사람을 잘 들이지 않는 성향이기 때문에 평생 내 사람이 몇 명 없다. 그리고 ‘내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다. 이런 성격이 화근(?)이었을까. 취직을 하면서부터 나는 그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내가 먼저 원하는 직종으로 취직을 했기 때문에 이제 내가 학생인 그를 끌어줘야 한다는 그런, 오지랖? 서울을 오가는 차비, 데이트비용 등을 모두 지불하는 것은 물론, 일을 하며 알게 된 서울 곳곳을 소개해주면서 그의 취준 시기를 북돋아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1년을 떨어져 있었지만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경주마처럼 그를 기다리며 나름 자리를 잡아갔다. 1년 후 그도 서울로 취직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객지생활의 동지로,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관계가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을 여실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조상님들의 지혜란.
그는 나에게 했던 숱한 약속들을 뒤로하고 다른 것에 빠져있었다. 원인 모를 결과만을 나에게 턱턱 안겨주며 내 삶을 의문투성이로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이상한 걸까, 그가 이상한 걸까…’ 하는 자기 의심에 빠졌고, 그런 감정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했다. 그러한 진탕 속에서도 나는 나의 창작 글을 쓰며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그의 중독에 의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가 철저하게 숨긴 중독을 알지 못했으나 말이다. 나의 깊은 관계중독은 그를 향한 나의 눈을 가려버렸다. 그가 틀릴 리는 없다고 믿어버렸으니까. 세상에 절대자는 없는데도, 나는 그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사람이므로 그는 ‘절대적’이어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생각해 본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이처럼 친밀한 관계를 쌓을 수 있을까. 현재는 많이 지친 탓인지, 그 프로세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살이 돋는다. 다시 어떻게 이와 같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마음의 여유가 허락될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너무 보수적인 사람인 걸까. 나름 진보(?)적인 마인드로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왜 때문인지 이성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시대 춘향이 스타일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을 너무 오래 만난 후유증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가까스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또다시 이러한 관계중독에 빠져버리면 어쩌나 겁이 난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결론은 또 같은 곳.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게 문제일까, 속이는 게 문제일까. 속는 사람이 바보인가, 속이는 놈이 나쁜 놈인가. 상대를 믿지 않는 사랑이 성립할 수나 있을까.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 중독은 사람은 삼킨다. 술도, 도박도, 약도, 관계중독도 모두 기생충처럼 숙주의 몸과 정신을 파고들어 끝내 목적한 대로 숙주를 집어삼켜버린다. 우리가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할 이유다. 숱한 위협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 각자의 고유한 임무 아닌가. 그의 도박중독이 나의 관계중독보다 더 강력했던 모양인지 좀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던 내가 결국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무려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항복이다. 결혼 후 처한 위기를 극복해 보려 버티고 버텼으나,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번을 계기로 여실히 깨달았다. 그래 인정, 내가 졌다. 그도 얼른 항복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디, 자신을 지켜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