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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Sep 05. 2022

짭쓸짭쓸해서 더 좋다.

고야 참푸루(ゴーヤーチャンプルー)와 오키나와

여름이 되면 여기저기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 창문을 향해 늘어진 그물망을 꼬불꼬불 타고 올라가는 줄기가 보인다. 오이처럼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진 자리에 가 보면 두꺼비같이 올록볼록한 얼핏 호박 같기도 한 열매가 달려있다. 한국에서 여주라고 부른다는 '고-야(ゴーヤー)' 이다.



초록색 고야와 흰색 고야(흰색 고야가 쓴맛이 덜하다지만 내가 느끼기엔 거기서 거기다.)



이 고야를 요리하는 데에는 꼭 쓴맛을 빼기 위한 손질이 필요하다. 소금이니 설탕이니를 섞어 조물조물해두거나 소금물에 데치거나 하는 게 필요한데 은근히 귀찮아서 좋아하는 마음과는 달리 손이 잘 가지는 않는다. 게다가 씹을 때마다 입 안에 빙빙 도는 쓴맛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기도 하고.



고야 참푸루. 내가 먹을 때에는 런천미트보다 돼지고기를 주로 넣고 만든다.



나는 오키나와에 처음 가서 '고야 참푸루' 라는 요리를 먹어보고 한눈에 반했다. '참푸루' 라는 것은 오키나와 말로 '섞는다'라는 뜻이다. 그냥 섞는 것도 아니고 마구 섞는 것을 말한다. 물기를 빼서 탱글탱글해진 두부와 계란, 얄찍하게 썬 눈썹 같은 고야와 오키나와 사람들의 소울푸드라고 할 수 있는 런천미트를 함께 볶은 고야 참푸루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모습과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입안에서 폭죽 터지듯이 팡팡 터지는 짭조름한 맛과 씁쓸한 맛이 자꾸만 젓가락을 가져가게 한다. 쫀득쫀득한 고야와 런천미트, 부드럽지만 탱글 거리는 두부와 계란의 식감도 먹는 동안 질릴 틈이 없다.


오키나와로의 여행도 그랬다. 신나게 놀고 열심히 열을 내느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회사를 가느라 만원 전철을 타고 있으면 '여기 앉으세요' 하고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워낙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던 나는 결혼하고 처음 맞는 여름휴가를 특별히 보내고 싶어 남편과 여행 계획을 세웠다.




오키나와(沖縄)

류큐왕국(琉球王国)가 있던 곳.

타이완과 일본 혼슈 사이에 있는 '동지나해(東シナ海)' 라 불리는 서태평양 연해에 떠 있는 150개 이상의 섬들을 모아 말한다.


아름다운 푸른 바다가 매력적인,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일본말이 누가 이야기 하든 같은 '일본어'로 들리게 되자 생활하는 것이 한국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맞는 2번째 겨울. 아직은 난방을 해도 추운 집이 익숙하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문득 자막을 보지 않고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 좋아서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부터 들리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다. 그러자 이제껏 걸어서 산책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전철을 타고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수도권의 웬만한 곳은 다 쑤시고 다녀서 이제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 다니던 회사에서 친하던 사람의 권유로 오키나와에 가게 되었다.


비행기로 무려 3시간을 타고 가면서 2시간이면 가는 한국을 떠올리며 '일본이란 참 넓은 땅을 가진 섬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두꺼운 파카를 입고 다녀야 하는 추운 1월에 의심을 한가득 품고 반팔을 챙겨 떠난 여행이었다. 공항을 내리는 순간 온몸으로 밀려오는 따뜻한 햇빛의 온기와 은은히 느껴지는 바다 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높다란 야자나무를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섬의 매력에 홀딱 빠졌다.


좋은 기억밖에 없던 오키나와를 남편과 나는 어쩌다 보니 가지 않았던 신혼여행 대신 가기로 정했다. 처음엔 모리셔스인지 모르디브인지 하는 거기가 거기 같은 눈부신 푸른 바다 위에 방갈로가 늘어진 곳을 후보로 늘어놓았지만 어딘지 구분도 안 가는 곳은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멘소-레(めんそーれ)'


환영한다는 오키나와 말이 우리를 반겼다. 여름의 오키나와는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에 무척이나 더웠지만 눅눅한 젖은 천을 몸에 감고 다니는 것 같은 도쿄와는 또 달랐다. 제일 좋았던 것은 수영복을 입고 나돌아 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간 곳이 본토(本島)에서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3박이나 했던 호텔은 너무나 친절하고 서비스도 좋았다. 잘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내 배를 보고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축하한다며 인사를 건네는 통에 무슨 유명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사방팔방에 모래를 뿌려대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온 섬을 돌아다녔다. 


좀 더 특별한 곳에서 묵어보자며 고른 궁전 같은 호텔은 멋지게 마지막 2박을 보내고 가자는 우리의 기대를 종이짝처럼 날려버렸다. 무슨 밥 하나 먹는데 드레스 코드를 운운하면서 옷은 물론 신발까지 빌려야 한다고 하질 않나. 화장실에 개미가 나왔다니까 대응해준다더니 와서는 밖에 나무와 풀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하고. 고상 떨어야 하는 분위기에 나다니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바로 전에 묵었던 호텔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연장을 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신기한 것은 쓰디쓴 기억이 오키나와를 더욱 그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즐겁기만 했다면 늘 가고 싶고 아쉬운 곳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입안에서 불꽃놀이처럼 팡팡 터지며 존재감 뿜뿜 내는 짭조름한 맛도 뒤이은 은근한 쓴맛이 없었다면 '맛있었다' 한마디로 잊혔을지도 모른다. 오키나와의 추억도 고야 참푸루의 맛도 '단짠단짠'은 아니지만 '짭쓸짭쓸(짭짤하고 씁쓸)'해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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