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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Oct 12. 2023

쪽빛보다 더 푸르고 깊은 배추의 맛

밀퓌유 나베(白菜と豚肉のミルフィーユ鍋)

'ㅇ내 생각에, 일본의 추위는 슬금슬금 찾아온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그렇다. 


갑작스럽게 아침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가 싶으면, 저녁엔 추워서 전날 켰던 에어컨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다. 구석에 쑤셔 놓았던 긴팔 옷을 꺼내 입고 한숨 돌릴 때, 꼭 땀이 절로 배어 나오는 날이 드문드문 돌아온다. 그러면 뭐, 다시 반팔을 꺼내야지.


춥다 덥다 반복하는 사이에 집 앞 큰길에 늘어선 은행은 노랗게 옷을 갈아입는다. 은행이 떨어져 짜부라진 길을 종종 대며 피해 다니느라 바쁜 때 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비가 참 자주 온다. 가을이라 하면 으레 높고 파란 하늘을 기대하건만. 구름이 껴서 우중충한 하늘은 비만 흩뿌려댄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코가 시리다 싶으면 겨울이 가깝다는 증거다. 이런 날은 따뜻한 국물이 생각난다. 자주 생각나는 메뉴 중 하나가 '밀퓌유 나베'. 


입에 넣고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감도는 배추와 고소한 고기의 콜라보. 

맛도 맛이지만 눈으로 보는 재미도 빼먹을 수 없다. 


보글보글 끓인 냄비(흙으로 만든 냄비면 더 좋다.)를 식탁 한가운데 올려놓고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뚜껑을 열 때의 '와-' 하는 환호도 옵션이고. 밀퓌유라는 이름답게 켜켜이 겹쳐진 배추와 고기는 그 모양새도 예뻐서 먹음직스럽다.


아. 밀퓌유가 뭐냐 하면.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으로 프랑스 과자 중에 페스츄리를 겹겹이 쌓아 올려놓은 과자를 부르는 말이다.  밀퓌유 나베는 과자 대신 배추와 고기를 쌓아 만든다. 겹겹이 층을 만들어 자른 후에 냄비에 눕혀서 꼭 꼭 채워놓으면 푸릇하고 하얀 배추와 붉은 고기가 층을 이뤄 보기도 좋다. 이 '겹겹이 층을 이룬다'는 것이 아마 이 요리의 핵심이겠지.


나는 이 요리를 남편의 엄마 즉, 시엄마에게 배웠다.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라는 존재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 시절. 집에서 카레, 니꾸자가(肉じゃが : 일본의 대표적인 가정식, 고기감자조림), 김치찌개 같은 것들을 뺑뺑 돌려 만들어 먹다가 질렸다. 새로운 요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에 오래 살고 더불어 요리를 줄곧 해서 손에 익으며 친근감 있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요리에 관심이 없는 몇몇 친구들은 제외, 오래도록 일본어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므로 제외, 이런 것으로 요리학원을 다닐 수는 없으니 빼고. 하다 보니 '시어머니'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아이 셋을 키우며 몇십 년 동안 집밥을 만든 사람. 


당장 남편을 통해 놀러 간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우리는 특별한 때에 모이는 것 빼고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눈과 입으로 먹는다는 '밀푀유나베'가 만들고 싶어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시엄마는 흔쾌히 오라고 하시며 같이 만들어 먹자고 하셨다. 배추와 고기를 준비해 오라는 명(?)을 받고 슈퍼에서 실한 배추를 열심히 고르고 골랐다. 하필 일본은 배추도 깨끗이 씻어 잘라 파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한 통짜리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시엄마는 냄비와 도마가 펼쳐진 식탁에서 이 요리가 얼마나 간단한 요리인지를 설명해 주셨다. 


"냄비에 배추랑 고기를 쌓기만 하면 돼."


덧붙이며 하시는 '맛있게 만들어보자'는 말에는 '밀푀유'라는 단어는 쏙 빠지고 '배추나베'만 남아 있었다. 


나는 요리의 베테랑인 시엄마의 말에 따라 배추를 잘랐다. 길게 반으로. 또 반으로. 산처럼 쌓여가는 배추 옆으로 커다란 냄비를 가져오신 시엄마는 이번에는 배추와 고기를 넣을 거라고 하셨다. 먼저 배추를 냄비에 깔고, 고기를 넣고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다시 배추... 음? 이렇게 쌓으면 내가 본 지층처럼 줄무늬가 보이는 나베가 되는 게 맞는 건가? 궁금증이 일었지만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사이에 스르륵 사라졌다. 이만하면 됐다며 냄비를 불에 올리고 뚜껑을 닫을 때엔 푸르뎅뎅하고 허연 배추만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배추들은 알아서 고기와 함께 층층이 늘어진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배추와 고기가 섞인 '배추나베'를 먹었다. 나의 첫 '밀푀유 나베'에 '밀푀유'는 없었다.


'이게 아닌데'


리벤지(재도전)를 하고 싶었다. 인터넷 속 베테랑에게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아하. 배추와 고기를 번갈아가며 깔고 비스무레한 높이로 잘라내기만 하면 되네. 그걸 차곡차곡 잘 세우면 되는 거였어. 간단하구만?' 


요점은 층층이 쌓은 것을 옆으로 눕혀서 층이 보이게 냄비 속에 세워 넣는다는 것이었다. 배추와 고기가 내 손을 거쳐 냄비 속에 차곡차곡 세워지며 밀푀유가 되어갔다. 감이 잘 잡히지 않아 층을 쌓다 쓰러뜨리고, 높이가 맞지 않아 들쑥날쑥 하던 것들도 점점 고만고만하게 맞춰졌다. 사진으로만 보던 하얗고 빨간 층이 생겨났다.





'바로 이거야!'

 

배추와 고기를 탑처럼 쌓는 스승에게 배웠으나 나는 그것들을 보기 좋게 옆으로 눕혀 놓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런 게 '청출어람'이지. 웃음이 절로 나 어깨가 들썩거렸다.


웃음은 다 된 요리를 먹기 위해 뚜껑을 열면서 환호로 바뀌었다. 기대감이 부풀어 터지니 입 안에서 맛도 팡팡 터졌다.  '폰즈(ポン酢)'라는 것에 찍어 먹어서 그런가? 감귤류와 식초를 섞은 얼핏 간장 같은 이 조미료는 새콤해서 밍밍할 수 있는 배추와 고기 맛을 딱 잡아준다. 여기에 '유즈코쇼(柚子胡椒)'를 곁들이면 이번엔 매콤한 맛까지 더 해져서 배가 불러도 자꾸 젓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마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유자와 고추로 만든 조미료가 얼마나 밀푀유 나베에 찰떡같이 어울리는지.


날이 추워서.

어느 날 슈퍼에서 통배추가 눈에 확 들어와서.

유즈코쇼의 매콤하면서 시큼털털한 맛이 생각나서.

간단한 요리가 먹고 싶어서.

내가 만든 밀푀유 나베를 보며 '와, 이쁘게도 많들었네.' 라며 환호하시던 시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이게 뭐냐며 되묻던 시엄마의 모습이 웃겨서.


참 많은 이유로 생각나는 '밀퓌유 나베'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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