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Sep 01. 2023

죽을 때까지 뛰어넘을 수 없을 TKG의 벽

타마고카케고항(たまごかけご飯)

 반'록키'라는 영화를 아는가. 무명의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땀범벅이 된 실베스터 스탤론이 컵에 계란을 가득 담아 후루룩 마시는 장면을 아는 사람은 꽤 많지 않을까. 앞, 뒤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계란 물 먹는 장면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속이 니글거려서 얼굴이 찡그려진다. 


나는 날계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 합창 발표회를 위해 열심히 연습한 적이 있었다. 학교며 집에서 줄창 노래 연습을 했다. 그걸 보시던 아빠가 컵과 계란 두 개를 가지고 오시더니 나를 불렀다. 막간을 이용한 마술쇼인 줄 알았다. 자주 마술쇼 같은 걸 하시며 웃기셔서 스트레스 해소하라고 그러나 보다 했다. 아빠는 계란을 깨더니 컵에 담았다. 투명한 컵에 들어있는 날계란이라니. 샛노랗고 둥글둥글한 것 두 개가 끈적대는 투명한 물 위에서 빙글빙글 헤엄을 쳤다. 그때까지도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마셔. 목소리 좋아져"


목소리가 좋아진다고? 솔깃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맘에 컵을 들고 꿀꺽꿀꺽 삼켰다. 미끄덩하고 끈적대는 것들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노른자가 넘어갈 때는 컥 소리가 절로 나왔다. 커다란 것이 순식간에 목을 막고 내려가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계란은 목으로 넘어가는데 코를 통해 나오는 비린내는 또 어떻고.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내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가 되었냐고? 아니. 뭐가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한 속만 니글거렸다. 난 두 번 다시 날계란 따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본에 와서 놀란 것은 계란을 참 다양하게도 쓴다는 사실이다. 날로 먹고. 수프로 만들어 먹고. 쪄 먹고. 프라이로 해 먹고. 말아서 먹고. 볶음밥에도 넣어 먹고. 한국에서 계란 프라이만 주로 먹던 나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 제일 신기했던 것은 날계란을 밥에 넣어 먹는 것이다. 일본 사람이라면 날계란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은 기본 옵션인 것 같다. 여태껏 만난 사람 중에 싫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밥 위에 날계란을 얹어 먹는 것을 '타마고카케고항(卵かけご飯)'이라고 한다. 이것을 영어로 발음 나는 대로 써서 줄인 것이 바로 'TKG : Tamago Kake Gohan'이다. 줄임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갖다 붙인 이름인 모양이다. 먼저 갓 지은 밥(물론 밥통 속에 들어있는 따뜻한 밥도 된다.). 갑자기 생각난 것인데 갓 지은 밥도 밥이지만 흰쌀밥을 선호한다. 정리하면 갓 지은 흰쌀밥 위에 계란을 깨 넣는다. 그 위에 간장을 두르면 준비 끝. 이제 각자의 취향껏 먹으면 된다. 계란을 밥과 함께 섞어 먹는 사람도 있고 올려진 그대로 먹는 사람도 있다. 공통점은 밥을 국처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후루룩' 하는 소리와 함께.





일본에 산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이 TKG의 벽만은 넘을 수가 없다. '넘사벽'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말을 잘하지 못하던 시절에는 먹는 것이라도 일본 사람 들과 똑같이 먹으면 닮을까 싶었다. 


"이게 먹는 거예요?"


일본에 오기 전에 일본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낫또를 설명해 주신 적이 있었다. 납작하게 생긴 하얀 스티로폼 용기를 열었더니 바닥에 달라붙은 콩 들이 참 이상해 보였다. 젓가락을 넣고 돌렸을 때 실을 만들어내며 덩어리 지는 모습이라니. 음식을 앞에 놓고 이야기하기 뭐 하지만 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쿰쿰한 냄새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짜고 신 매실장아찌도 왜 먹는지 모르겠는 음식 중 하나였다. 


일본에 와 보니 낫토를 먹을 기회가 많았다. 가장 큰 매력은 가격이 싸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영양가도 높으니 일석이조였다. 우메보시 역시 보존기간이 길고 한 알만 있으면 조금 오버해서 밥 한 공기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꾸 찾게 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낫또의 쿰쿰함과 늘어지는 실은 적응하는데 꽤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먹는 모습을 보면 맛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겨자와 간장을 넣어 쓱쓱 돌려 입에 넣으면 짜고 코끝이 살짝 찡 해지는 겨자 맛이 한 알 한 알 굴러다니는 발효된 콩과 어우러져 맛있다. 우메보시는 또 어떻고. 밥 위에 한 알 척 얹으면 그렇게 든든하다. 조금 피곤한 날이면 저절로 우메보시를 떠올린다.


처음 일본에서 함께 온 상사만 졸졸 쫓아다닐 적에는 점심도 데리고 가는 곳으로만 갔었다. 상사는 날계란을 깨 넣어 먹는 스키야끼(すき焼き) 를 좋아했다. 스키야끼란 달큰 짭조름한 소스에 소고기와 두부, 야채들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 날계란에 찍어 먹는 요리이다. 소스는 단짠의 극치이다. 날계란에 찍어야 비로소 고소한 맛이 살아난다. 물론 나도 찍어먹어 본 적이 있다. 궁금했다. 상사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러나 내 입에는 고소하기는커녕 입에 투명한 막처럼 남는 것 같은 날계란이 걸리적거릴 뿐이었다. 결국 건더기만 먹다가 질려서 남기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며 한 사람의 일꾼으로 대접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친해지는 일본 사람 역시 하나, 둘 늘어났다. 자연스레 밥을 함께 먹는 일도 많아졌다. 가끔 생각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TKG 함께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한 동료에게 TKG를 함께 먹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들떠서 맛있는 집까지 알아보고 '언제' 가서 먹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언제'는 내가 망설이는 사이 오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날계란은 내어준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에게 TKG를 가르쳐준 건 남편이었다. 막 지은 밥을 내어주고 반찬을 준비할 때였다.


"계란 좀 줄래? 간장도"


속으로 욕지기를 했다. '우웩, 또 또 날계란 밥 먹는다.' 차마 겉으로는 아무 말 못 하고 속으로 구시렁대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자기들도 먹어보고 싶다고 난리였다. 날계란에는 바이러스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아직 날것을 먹기에는 빠르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내 손은 알아서 아이들 먹을 계란까지 챙겨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남편은 아이들 앞에서 먼저 시범을 보였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시범이라고 하기엔 웃기지만. 그걸 또 왜 아이들은 진지하게 따라 하는가. 일단 계란 깨는 것이 가장 큰 관문이었다. 노른자가 터졌네. 계란 껍데기가 들어갔네. '어후, 시끄러워.' 그러더니 간장을 넣고 휘적대기 시작했다. 벌써 나는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노랗고 허연 국물(?)과 버무려진 밥알들이 어디가 맛있어 보인단 말인가. 그걸 또 숟가락으로 먹는 모습 하고는.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아 맛있다는 소리만 귀로 들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저 그릇을 씻으려면 손을 미끄덩대는 그릇 속에 넣어야겠지.' 뒤처리만 신경 쓰면서. 그런 나를 보며 아이들은 엄마는 왜 안 먹냐고 물어본다. 그럴 때면 나는 확실히 대답한다.


"난 안 먹어. 날계란은 싫어하거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말이 있다. 외국에 왔으니 말은 물론이고 먹는 것도 이곳 사람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똑같은 것을 먹으면 저절로 녹아들기라도 할 것처럼. '외국인이라서 그렇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이 틀린 것은 내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조금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라고 생각할 무렵이 돼서야 깨달은 것이다. 


TKG의 벽은 너무나 높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가 날계란을 못 먹는다고 하면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마주하고 웃는다. 아니 벽이 높은 걸 어쩌란 말이냐고. 살다가 낮아지면 한번 뛰어넘어보던가. 오늘은 계란말이나 해 먹어야겠다. 프라이도 좋고.

이전 04화 시끌벅적하고, 군침 돌며, 저절로 눈이 감기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