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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Sep 08. 2023

가지는 가지어도 다 같은 가지는 아니어라.

가지 튀김히타시(揚げなすのお浸し), etc.

가지의 뭉글한 식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밥상 위로 올라오는 가지 요리는 푹 쪄서 양념장을 뿌려 먹는 것이었다. 씹는 맛이 별로임에도 양념장의 맵고 짠맛이 좋아 먹었다. 보랏빛 탱글한 가지를 뭉글하게 쪄서 찢어내는 것도 재미있었다. 젓가락을 가지에 콕 찍은 뒤에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면 결대로 쭉 갈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아는 가지요리라고는 그게 다였다. 일본에 와서 만난 가지는 새로웠다. 정체가 뭔지도 모르게 튀김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새초롬하게 밥 위에 얹혀 있었다. '와삭' 귀가 즐거운 소리 뒤에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좋았다. 갈아낸 무를 넣은 쯔유에 살짝 담갔다 먹으면 느끼한 줄도 몰랐다.


'아, 기름에 튀겨도 되는구나.'


온천에 놀러 갔을 때였다. 전채요리부터 메인,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순서대로 가져다주는 카이세키요리(懐石料理)를 내어놓는 료칸에 머물렀다. 지금이야 식당이나 홀 같은 곳에서 음식을 먹는 곳이 많지만,

한참 전에는 방으로 요리를 날라주는 곳도 많았다. 그때 머문 곳이 그랬다. 다다미로 된 방에서 유카타를 입고 정성스레 가져다주는 요리를 먹는 기분은 어색하고, 좋았다. 누가 요리를 해 주는 것 자체로도 좋은데 내 앞으로까지 가져와서 차려주기까지 하다니. 뭘 먹어도 꿀맛이었다.


카이세키요리에는 오시나가키(お品書き)라고 부르는 요리 이름이 순서대로 적힌 종이가 함께 나온다. 깔끔한 종이에 어찌나 정성스럽게 메뉴를 적어 놓았는지. 천천히 훑는데 눈길을 잡아끄는 요리 이름이 있었다.


'튀긴 가지 오히타시(揚げなすのお浸し)' 


히타시라 하면 간을 한 다시 국물 같은 것에 재료를 재어 놓는 요리를 말한다. 주로 코마츠나(小松菜)라 부르는 열무잎 비슷한 야채나 시금치를 데쳐 만든다. 그런데 히타시 앞에 가지가 붙었다? 그것도 튀긴 가지. 가지는 튀겨서 밥 위에 얹는 것 아니던가.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열심히 입으로 나르는 사이에 드디어 튀긴 가지 오히타시가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랏빛 가지가 다시 국물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하얗게 갈아낸 무가 눈 내린 듯 덮여 있었다. 가지에 난 칼집도 예뻐 보인 건 눈의 착각일까? 냉큼 한 입 넣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맛있어서. 





가지의 말캉한 살을 씹으면 한껏 머금고 있던 다시 국물이 입안 가득 퍼진다. 달기도 하고 짜기도 하면서 새콤하기도 한 국물. 꿀꺽 삼켜내고 가지를 꼭꼭 씹어낸다. 눈처럼 갈아졌지만 아삭한 맛이 남아있는 무가 '나 여기 있다'라고 소리치듯 아우성이다. 아. 맛있다. 


혼자 살 때는 먹는 데에 흥미가 없었다. 한 알만 먹으면 배를 든든히 불려주는 알약 타령이나 했다. 배고픔은 느꼈지만 음식을 먹는 게 귀찮았다. 입에 넣어야 하지, 씹어야 하지, 삼켜야 하지. 일련의 과정들을 생략하고 배꼽시계가 울림과 동시에 뱃속에 음식을 넣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저절로 음식에 관심이 생겼다. 각각의 재료가 가진 영양분을 따지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요리법으로 조리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까지 신경 썼다. '이왕이면 아이에게 맛있는(좋은) 것을 먹게 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매번 같은 요리만 해 먹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지도 지지리도 오래도록 계속된 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지 요리라는 것은 한두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다. 한번 맛있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가지가 들어간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심이 없을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가지를 잘게 썰어 넣은 고기로 만든 함바그. 껍질을 통째로 썰어 넣으면 씹힐 때 쫀득하다. 뭉치지 않고 볶아 양념을 한 미트소스는 '가지 안 먹어' 대장 우리 집 아이들의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다. 먹으면서 저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걸 볼 때는 옆으로 입이 찢어지는 만큼 기분도 째진다. 유치원에서는 가끔 아이들과 심은 가지를 소금만 뿌려 조물조물해서 먹을 때가 있다. 겨우 소금만 뿌려 절였을 뿐인데. 보라색 가지는 반짝반짝, 쫄깃쫄깃 변신을 한다. 혀에 남는 달큼함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그걸 몇 번 먹고 아이들은 소금에 절인게 맛있었다며 가지를 볼 때마다 이야기한다.


가지는 가지어도 다 같은 가지는 아니어라. 자르고 굽고 튀기면 맛도 시시각각 바뀌니. 매력이 철철 넘친다. 매번 다르게 해 먹으면서도 또 다른 모습을 찾는다. 질리지 않고 자꾸 손이 가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더운 여름이 되면 보랏빛 물이 진하게 들어 검게 보이는 가지들이 슈퍼에 진열된다. 예전 같으면 모른 척하고 지나갔을 진열대에서 나는 잘 빠진 가지를 고르느라 진지하다. 뭘 해 먹을지 생각도 안 했는데 입 안 가득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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