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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Sep 12. 2023

자글자글, 헤쳐 모여

봄 빠진 양배추 카키아게(かき揚げ)

호노보노(ほのぼの)한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일상적이면서도 힐링이 되고 마음이 따뜻한 이야기라고 하면 되려나. (호노보노가 뭔지 한국말로 찾아보니 '따스하게 느껴지는 마음'이라고 나왔다) 그날은 포스터에 쓰인 문구에 끌려 영화를 하나 보고 있었다. 


흐드러진 벚꽃 반. 내리는 눈 반. 

눈 속에는 새파란 다운을 입은 여자가 삽을 들고 서 있었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기 위해 만든다.'


작게 쓰인 문구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흐드러진 벚꽃에서는 좋아하는 사쿠라모찌(桜もち : 벚꽃을 넣고 만든 떡)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괜히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리틀 포레스트 - 겨울, 봄>였다. 


홀로 일본으로 넘어와서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던 시기. 살기 위해 먹었다. 배가 고파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간장과 설탕으로 버무려진 듯한 일본 음식은 금세 질렸다. 한국에서 매 끼니 김치를 올려 먹던 입맛이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맛을 찾아 꾸역꾸역 제 머릿속에 있는 한국음식을 만들었다. 슈퍼를 이 잡듯이 뒤져서 비슷한 맛이 나는 야채나 조미료를 찾았다. 마늘쫑, 두반장 같은 것들.


특별히 향수병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입과 속은 자꾸 익숙한 맛을 찾았다. 타국의 언어에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지만. 가끔 외식을 하더라도 새로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모르니 가던 곳만 찾았다. 가서도 똑같은 것만 시키니 질릴 수밖에. 


늘 만들던 내 나름의 한국음식도 변화를 주지 않으니 서서히 질렸다. 재료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더더욱. 조금씩 일본 요리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매운 것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속이 자주 말썽이었다. 입과 속이 따로 놀아서. 거기에 간장과 설탕과 맛술을 주로 쓰는 일본 음식들은 꽤나 궁합이 좋았다.


먹고 싶은 요리를 생각해서 재료를 사다 해 먹은 건 결혼을 하고 나서의 일이다. 싸고, 눈에 익은 재료들에서 벗어나서 레시피를 검색하고 필요한 것들을 사다 만들어 먹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보는 내내 군침이 돌게 하는 마법 같은 영화였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봄 양배추(春キャベツ) 카키아게를 먹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주름이 자글자글 져서 가벼우면서 꼬들꼬들해서 날로 먹어도, 볶아 먹어도 맛있는 봄 양배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는 영화 속 대사에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카키아게는 재료를 잘게 잘라 밀가루 옷을 살짝 입혀서 모양을 잡아 기름에 튀겨낸 음식을 말한다.


먹고 싶어졌다.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6인가족이 되어 떠난 여행에서 연말연시를 보내기로 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일 년에 마지막 날 밤, 건강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바람을 담아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를 먹는다. 이때 여러 가지 재료에 튀김옷을 입혀 튀긴 덴뿌라(天ぷら)를 곁들인다. 우리는 봄 양배추 카키아게를 올려 먹기로 했다. 몹시도 맛있다는 봄 양배추의 카키아게를 꼭 먹고 싶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행지에서 상점가를 찾아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야채가게를 이 잡듯 뒤져 양배추를 찾았다. 속이 빽빽하게 차지 않은 것이 봄 양배추와 비슷하다며 골랐지만 거기에 '봄'은 쏙 빠지고 없었다. 보통 3월부터 슈퍼에서 볼 수 있는 것을 12월에 찾다니 웃기는 이야기였다. 마음속으로 기다리는 봄을 정성과 함께 버무려 요리에 담기로 했다. 삽질의 시작이었다.


배밀이로 낑낑대며 뒤로 가는 둥이들. 놀다가도 금세 싸우고 자꾸 엄마를 찾는 첫째와 둘째. 남편과 아이들을 놀리고 달래며 부엌에 섰다.


양배추를 잘게 잘라 튀기려고 칼질을 하는데 빠릿빠릿한 맛이 없이 축 처졌다. 튀기면 빳빳해지니 괜찮겠지 했다. 준비한 튀김옷 반죽에 넣고 양푼이 비빔밥이라도 비비듯이 쓱쓱 비벼서 달궈놓은 기름에 넣었다. 카키아게는 잘게 흩어진 재료들을 모아서 튀기는 것이 포인트다. 마침 오목한 국자가 있어 모양 잡는 데는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연습 삼아 국자로 튀김반죽을 떠 기름에 넣었다. 자글자글 하는 소리와 고소한 튀김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런데 어라? 튀김반죽을 묻힌 양배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젓가락으로 아무리 모아도 하나로 뭉쳐질지가 않았다. 좀 뭉치라고.


‘튀김옷이 너무 묽은게지’ 


밀가루를 더 뿌렸다. 다시 섞고, 국자로 떴다. 기름 속으로 풍덩. 이번에는 흩어지지 않아서 제대로 될 것 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시간을 두고 야채들이 단단하게 뭉쳤을 거라고 생각되어 젓가락으로 살짝 떼어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동그랗게 모양 잡힌 양배추 튀김이 둥둥 떠 다녔다. 


‘아뿔싸’ 


국자에 고집스럽게 달라붙은 튀김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좀. 떨어지라고.'


힘을 줘서 떨어지지도 않는 반죽을 억지로 떼어내니 젓가락은 물론이고 국자마저 덕지덕지 붙은 것들로 지저분해졌다. 새로 씻어내고 깨끗한 상태로 다시 튀겨보고 싶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빠와 첫째 둘째에 둘러싸인 쌍둥이들은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자꾸만 커지는 목소리에 식은땀이 났다.


‘자글자글 헤쳐 모이랬지 딱 붙어 있으라고는 안 했는데.’ 


이번에는 물을 추가하고 다시 기름 속에 반죽을 떠 넣었다. 숟가락에도 올려보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튀겨보고 별 방법을 다 썼다.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문득 그럴싸한 양배추 카키아게가 완성되었다. 실패한 튀김으로 접시가 가득 찼을 때의 일이다. 완성품을 올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싱크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튀김이 눌어붙은 흉측한 국자와 끝에 둥그런 물방울 같은 밀가루 덩어리를 달고 있는 젓가락이 나의 수고를 말해주고 있었다. 생애 첫 카키아게를 완성한 순간이었다. 





완성된 카키아게를 소바 국물에 찍어 먹는 맛은 끝내줬다. '와삭' 하는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의 표정을 보는 기분은 또 어떻고. 엉망진창이 된 부엌을 치울 걱정 따위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이렇게 맛있으면 또 만들고 싶어 지잖니.’ 


제대로 만드는 방법 좀 공부해야 하나. 봄을 품은 양배추로 만들면 어떤 맛일까. 괜히 다가올 봄에 입 안이 설렌다.

이전 09화 가지는 가지어도 다 같은 가지는 아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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